그렇게 며칠 지났는데, 오늘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주영이가 그 남자를 만나러 간다는 거다. 느닷없이? 네 일엔 이제 상관 안 하기로 했는데? 아, 몰라. 왜 나한테 말하는 건데. 왜.
“전화 왔어. 일단 만나재. 만나서 얘기하재. 와!! 믿겨? 믿어져? 이거 꿈 아니야? 나 사실 좀 맘 접고 있었는데... 정말 대단하지 않아? 나 완전... 완전 흥분돼!”
아주 난리도 아니다. 누가 보면 복권당첨이라도 된 줄 알겠다. 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뚱하니 있었는데, 주영이가 나를 팍 껴안았다. 그녀의 표정은 지금 행복으로 충만해있다. 아, 어쩌면 좋아. 저리도 좋을까. 괜찮을까? 난 말없이 불안한 눈빛으로 주영이를 바라봤다.
오후 4시, 흰 구름이 하늘을 관통하여 파란색을 없애버리고 있었다. 아침의 차가운 공기가 물러가고, 정오의 뜨거운 햇빛도 사라졌다. 대신 솜사탕처럼 나른한 오후의 공기가 스멀스멀 다가오기 시작할 쯤이었다. 주영이 그 남자를 만나는데 왜 날 데려갔는지는 모르지만, 커피숍 앞까지 같이 왔다. 차에서 내리려는데, 갑자기 주영이가 “여기서 기다려.”라고 말했다. 여기까지 와놓고 들어가지 말라고? 차 안에서 기다리라고? 이건 또 무슨 경우야. 나도 그 남자를 보고 싶다고. 대체 얼마나 잘난 사람이길래, 네가 이렇게 빠져버린 건지 궁금하다고. 나가려고 했지만, 주영이가 제지했다. “미안해. 같이 갈 수 없어.” 나도 갈래. “미안.” 난 친구를 빤히 바라보다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존중해주어야 한다. 친구의 기분을, 감정을, 상황을.
주영인 문을 닫고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다행인 건, 주영이와 남자가 창가 쪽에 앉아서 그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키는 좀 큰 편이고, 얼굴은... 글쎄 잘생겼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렇다고 못생겼다고도 할 수 없는 좀 평범한 얼굴이다. 그래도 비호감보다는 호감형에 가깝다. 둘은 보자마자 뭐가 좋은지 환하게 웃었다. 근데 곧 약간의 어색함과 긴장이 흐르는 걸 보니 아직 그렇게 편한 사이는 아닌 모양이다. 누가 보면 소개팅이라도 하는 줄 알겠다. 혹은 썸이라도 타는 관계처럼 약간 설렘도 갖고 있었다.
종업원이 다녀가고 테이블에 커피 두 잔이 놓였다. 한두 번 주영이 날 보고 싱긋 웃었다. 기분이 아주 좋아보였다. 대체 저 남자의 매력은 뭘까. 겉으로 봐선 도통 모르겠다. 말을 나눠보면 알 수 있을까? 그의 숨겨진 배려 혹은 박학다식, 그것도 아니면 선수 빰 치는 매너와 달콤한 말? 대체 뭘까. 지금이라도 문을 박차고 나가, 커피숍으로 돌진하여 주영이를 끌고 나와야 하는 걸까?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너 이래선 안 된다고. 그 남자의 셔츠에 커피를 쏟으며 정신 차리라고, 이 여자는 유부녀라고, 말해줘야하는 건가.
순간 주영이가 저 남자에게 유부녀라고 밝혔는지 궁금해졌다. 설마 미혼이라고 속인 건 아니겠지? 그래, 주영이가 그렇게까지 양심이 없진 않다. 그러니 아마 남편이 있다는 말은 했을 것이다. 아, 불쌍한 주영이의 남편. 갑자기 주영이의 착한 남편이 안쓰러워졌다. 부인이 딴 남자와 나른한 오후 4시에 세상 무거운 눈꺼풀을 번쩍 올릴만큼 재밌는 대화를 나누며 양 볼을 붉히고 있다는 걸, 아마 그는 모를 것이다. 그것도 모른 채 그녀를 위해 새로운 가구를 디자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난 그냥 고개를 돌리고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차라리 안 보는 게 낫다. 생각도 안 하는 게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