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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순미 Dec 16. 2023

겨울나무

어제는 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눈이 내린다. 바람까지 불어 와 외출해서 걷고 있는데 눈보라로  얼굴이 얼어버릴 것 같았다. 그래도 얼굴을 들어 치악산을 바라보니 멀리 보이는 산의 정상 쪽이 하얗게 변했다.  등산하면 멋있겠다. 사실 등산도 할 수없는 몸이지만 오래전 다니던 등산 중에 보았던 하얀 겨울산이 그리워지는 날이다.


"치악산이 예쁘네. 내일 눈보러 갈까?"

찡긋거리며 물어보니 그분께서는 겨울등산을 꿈꾸는 것 같아 미안하다.

"아니, 차 타고가서 눈구경 할 수 있는곳으로 가고 싶어."


바빠도 토요일엔 브런치에 글 한편 올려야지 생각은 하는데 그 또한 쉽지 않다. 이번주는 서울에서 내려와 집에서 보내니 여유시간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랜만에 만나야 할 사람들도 많고 한동안 다니지 못헀던 동아리 모임에도 얼굴을 보여주러 나가 밀린 수다로 시간을 보내다보니  더 바쁜 나날이었다.  쓰다가 마무리 하지 못한 어수선한 글을 끄적이며 게으름을 반성하다가 오래전에 써 놓은 눈 이야기 한 편을 브런치에 올려본다.



겨울나무 / 이순미     


일기예보에서 영동지방에 폭설이 내릴 것이라고 했다. 폭설 소식을 들으니 하얗게 눈이 쌓인 겨울 산에 가고 싶었다. 눈이 덮인 산을 등산하겠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임을 알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간절한 마음이 남편의 팔을 흔들었다.     


겨울 산을 가고 싶다는 나를 바라보며 망설이던 남편과 집을 나섰다. 바람을 가리기 위해 모자를 눌러쓰고 고글과 목도리로 얼굴을 감쌌다. 방한복을 입은 아래로 두꺼운 장갑을 끼고 스패츠로 바지를 감싸 겨울바람이 한 올 들어오지 못하도록 단단이 무장을 했다.     


바람대로 산은 하얀 세상이었다. 펑펑 내리는 눈과, 지난 밤 찬바람과 함께 엉킨 상고대가 갈색의 나무줄기를 모두 하얗게 만들었다. 온몸을 등산복과 장비로 싸매고 올라가며 산의 경치를 바라보는 나는 정말 좋았다. 경치의 아름다움도 좋지만 내가 드디어 겨울 산행을 해내고 있다는 삶에 대한 자신감으로 가슴이 벅찼다.     


옆을 지나가던 등산객이 소리쳤다.     


“정말 멋있어. 죽어도 좋아.”     


누군지도 모르는 그를 나는 향해 소리쳤다.  

   

“죽으면 안돼요. 내년에 또 와서 이 산을 다시 봐야지요.”     


등산객은 환상적인 겨울 산의 경치에 취해 지르는 환호성이다. 하지만 나는  한 쪽만 바라보는 가재미처럼 죽음의 어두운 세계를 바라보다가 이제 겨우 고개를 돌려 다른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농담일지라도 죽음의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살면서 우리는, 지나친 어려움이 내게 올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건, 내 일이 아니라 그저 누군가가 겪어내야 하는 나와는 상관없는 일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삶은 예상할 수 없다. 누군가가 겪어야 할 어려움이 불쑥 내 앞에 나타났다. 내게는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암이 나타났다. 암을 선고받고 막막했다. 이제 저 밝은 세상을 다시 볼 수 있기는 한 걸까, 하는 두려움에 마음이 몹시 우울했다. 남들은 새해를 맞아 들뜬 마음으로 일 년을 계획하는데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차마 눈물도 흘리지 못한 채 마음이 꽁꽁 얼어 있었다.    

 

마음이 얼어붙어 웃음은 사라졌지만 그 사이로 시간이 흘렀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수술과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가 진행되었다. 의사 선생님 말씀에 고분고분 복종하면서 병원을 오가는 동안 계절이 바뀌었다. 가을이 올 무렵부터는 치료기간 동안에 약해진 몸을 추스르려 동네를 걸었다. 동네를 걷던 걸음은 마을 산으로, 마을 산에서 다른 지방의 산으로 가벼운 등산을 시작했다. 물론 나를 일으키기 위한 가족의 엄청난 노력이 가져온 결과였다.     


겨울바람처럼 차갑고 혹독한 항암치료로 머리카락이 다 빠졌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이 정말 나일까? 왜 내게 이런 일이 있어 났을까. 내가 맞지만 그 상황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날들이었다. 예상할 수 없는 내일이 두려워서 얼어버린 가슴으로 떨고 있는 내가 바로 겨울나무다.     


사람들에게 환호성을 지르게 하는 하얀 나무를 바라보았다. 초록이 사라진 산등성이에 지난 밤 상고대를 얼리면서 차가운 바람을 다 이겨내고 조용히 서서 내리는 눈을 덤덤히 받아내고 있는 나무. 지난봄과 여름을 지나면서 초록의 이파리가 우거졌건 나무가 가을에는 단풍이 들었고, 겨울이 되니 잎파리 하나 남기지 않고 마른 가지로 서 있다. 해가 진 밤이면 산 위에서 부는 찬바람과 낮은 기온 속에서 추위에 떨며, 눈물 같은 작은 이슬방울마저 하얗게 얼려서 흰 나뭇가지로 서 있는 나무다.


겨울의 찬바람을 견디는 나무가 투병의 차가움과 싸우는 나와 닮았다.

    

이제 조금 더 시간이 지나 봄이 오면 겨울을 이겨낸 나무에서는 봉긋이 싹이 틀 게다. 싹은 나무의 일 년을 다시 풍성하게 만든다. 산을 내려오며 바람과 눈 속에서 당당하게 겨울을 이겨내는 나무와 같은 삶을 달라고 기도했다. 아니 지금까지보다 더 건강한 내일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나무에게 겨울은 내일을 위한 휴식의 시간이다. 내게도 잠시 휴식시간이 필요하다면 지금의 시간이 아닐까? 민머리가 되었던 머리에는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올라와 자라고 있다. 머지않아 모자를 벗고 햇살을 받으며 걸을 수 있을 것이다. 겨울이 지나 내게로 올 봄을 기다린다.      (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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