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에서 출발해 영동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주변의 산 풍경이 아름답다. 언제 내린 눈인지 바닥으로는 하얀 눈이 보이나 산의 나무는 마른 가지만 남아 있다. 마른 나무가 만든, 꼭지점없는 둥근 삼각모양이 겹겹이 늘이선 선명한 능선이 아름답다. 그러나 진부로 들러서며 산의 모양이 변하고 대관령부근에서는 눈이 많이 내린다. 길은 미끄럽고 보이는 풍경은 모두 하얗다. 나무들은 하얀 옷을 입었다. 온통 하얀세상이다.
평창 나들이는 손녀를 만나기 위함이다. 지난해까지 돌보던 아이가 제 엄마와 함께 지내는데 늘 할머니 이야길 한단다. 지금 딸 가족이 여행중인지라 아이를 만나러 겨울 길을 한 시간 달렸다.
호텔 로비에 앉아 있는데 저만치서 아이가 달려 온다. 넘어지면 어쩌려고 저렇게 빨리 빛의 속도로 달려 오는지? 달려 와 넘어지듯 몸을 날려 품에 안기는 아이. 예뻐졌다. 아이를 보살필 때는 피곤함으로 지쳐 예쁜 것을 몰랐는지 삼주 만에 만난 아이는 많이 컸고 엄청 예뻐졌다. 너, 원래 이렇게 예뻤니?
문득 한 삼십년쯤 전의 일이 떠 오른다. 작은 사무실에 나가며 아이를 키우는 일은 힘들었고 늘 지쳐있었다. 어느 날, 이유는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나는 화가 많이 났었고 딸을 많이 야단쳤다. 학원갈 시간이 되서 아이는 울며 학원을 갔고, 아이가 돌아오기까지 한 시간. 그 한 시간 동안 저녁을 준비하며 아이가 돌아오면 다시 야단칠 생각으로 부아가 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아이가 벽 뒤에 숨어 고개만 내밀고
"엄마, 미안해요. 잘못 했어요."
하고 배시시 웃는다. 순간 화는 사라지고, 그때까지 화가 안 풀린 내 마음이 미안해졌다. 초등학교 일 학년보다 철이 없는 엄마같아서.
그 딸이 결혼을 하고 딸을 낳았다. 건강이 나쁜 나는 손녀 돌보고 살림해주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런던 차에 딸의 결심으로 육아에서 해방됐고 내 삶은 편안해졌다.
지난 연초에 우리 집에 다니러 온 딸 가족. 손녀는 내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간다. 방문을 닫고 내 옆에 앉아 책 읽어달라, 이야기 해 해 줘라, 장난감 가지고 같이 놀자고 보챈다. 왜 다른 식구랑 안 놀고? 할머니가 좋단다. 하루의 자유시간을 다 빼앗겼다. 아이고 힘들다. 날 바라보며 웃는 모습은 예쁘지만 힘든 건 힘든 거다.
아이가 자기 집으로 돌아갈 시간인데 같이 가고 싶단다. 다음에 다시 만나자며 새해 선물 해 주겠다니
" 할아버지 할머니가 함께 우리집에 오는 게 선물이지."
하고 말한다. 다섯 살 손녀의 생각이다. 집으로 돌아가며
" 아까까지는 행복했는데 할머니랑 헤어져 안행복해."
라는 말에 잠시 힘들어서 귀찮은 마음을 가졌던게 미안하다.
그때도 삼십 년전 어린 딸의 모습이 떠 올랐다. 아이를 야단치고 화를 풀지 못 하는 내게 먼저 미안하다고 화해의 웃음을 보내던 아이. 이제는 내게 매달리는 손녀가 힘들다고 생각하는데 어린 손녀는 내가 있어서 행복하단다. 나이 들어 내 몸 생각을 먼저 하는 이기적인 할머니가 되었나? 반성이 필요하다.
오늘 호텔 로비 저 멀리서 나를 향해 달려오는 다섯살 손녀. 아이의 흥분한 웃음 소리에 맞추어 나도 큰 소리로 아이를 부르며 벌떡 일어나 손녀를 품에 안았다. 이 시간 아이가 행복하기를 바라며. 나도 네가 있어 행복 하단다. 내 행복이 온전히 아이 것이 되기를 바란다.
평창 대관령지역.
눈이 엄청 내렸다.(1.20)
청소년 동계 올림픽 기간중 아름다운 설경을 보여주지만, 운전 하는 남편 옆에 앉아 많이 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