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순미 May 06. 2023

그리운 바지랑대

그리운 바지랑대

                                                         

비 내리던 어제와는 달리 햇살이 맑다. 파란 하늘아래 일렁이는 공기는 이제 습한 더위가 아닌 햇살이 가득한 선한 바람을 담고 있다. 반짝이는 햇살을 보면 무엇이든 말리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건, 아마도 시골이 고향이기 때문인 것 같다. 습기가 사라진 파란 가을 하늘 아래 따사로운 햇살 속에서 고추를 말리고 호박이나 가지 같은 채소를 얇게 썰어 말리던 그 옛날의 습관은 중년이 지난 지금도 가을이면 몸을 들썩이게 하는 그리움이다. 사라져 가는 이런 소일거리가 아니더라도 맑은 햇살 아래에 이불이라도 훌훌 털어 말리면 참 좋겠다.


요즈음 서울에서 생활한다. 딸의 아파트다. 내 집을 비워두고 딸의 아파트가 내 집처럼 된 것은 손녀를 돌보기 위함이다. 아이들이 결혼하면 책임을 다 했다고 하지만  맞벌이하는 딸을 위해 이렇게 내 생활이 바뀌어 간다. 창밖으로 반짝이는 햇살을 내다보고 있자니 참 아깝다. 저 햇살이. 세탁기에서 빨래가 돌아가고 있으니 그 빨래를 널어 뽀송하게 말리고픈 충동이 인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아파트에는 빨랫줄이 없으니 말이다.


고향은 농촌 마을이었다. 기와지붕 마당을 지나 대문을 열면 누런 벼들이 익어가고 메뚜기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들을 가진 마을이었다. 정지용의 시 <향수>에 등장하는 마을처럼 얼룩빼기 황소는 아니지만 누런 황소가 누워 풀을 뜯었고, 실개천이 흐르는 마을 한쪽에서는 빨래를 할 수 있었다. 디딤돌에 비벼 흐르는 맑은 물에 헹구어 빤 빨래는 마당의 빨랫줄에 널었다. 집의 한쪽 추녀 끝에서 저쪽 건너편 행랑채 모서리로 연결된 긴 줄 가운데는 바지랑대가 있었다. 기다랗고 굵진 않지만 가느다랗다고 할 수도 없는 적당한 굵기의 나무 끝에 굵은 못을 박아 그곳에 빨랫줄을 연결해 늘어짐을 막아주는 바지랑대. 그날의 빨래에 따라 바지랑대의 위치를 조금씩 움직여주면서 중심을 잡아 빨래를 말렸다. 때로는 이불홑청이나 이불이 빨랫줄에 널리기도 했다. 저녁 무렵에 종일 햇살을 받아 뽀송하게 마른 옷들을 걷을 때의 그 가슬가슬한 촉감이 참 좋았다.


지나간 시간의 빨래는 언제나 햇살을 가득 담았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생활하던 아파트에도 빨래를 말릴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베란다 안에 시공되어 있는 빨래 건조용 설치기구 외에도 창문 밖으로 또 다른 설치를 해서 빨래 말리기를 했다. 아무래도 베란다는 실내와 비슷한 조건인지라, 실외의 바람을 덜 타므로 순전히 빨래를 말릴 용도로 가느다란 알루미늄으로 건조대를 설치했던 것이다. 그 역시 고향 집의 바지랑대 있는 빨랫줄과 비슷하게 사용되었다. 빨래를 말리고 가끔은 이불을 널어 뽀송한 촉감의 맑은 기분을 느끼는데 아무런 부족함이 없었다.


같은 아파트라 하더라도 딸의 아파트에는 빨랫줄이 없다. 베란다의 일부도 거실로 연장되다 보니 부담 없이 쓸 수 있는 베란다가 부족하다. 그 이유가 아니라 하더라도 아파트에는 빨래를 널어 말리는 집이 없는 것 같다. 실내에 작은 빨래 건조대 정도야 있지만 대부분은 건조기를 사용한다. 세탁한 빨래를 건조기로 옮겨 일정 시간이 지나면 뽀송하게 말려져 나오는 빨래. 참으로 편리한 기계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그 기계에 익숙하지 않다. 물론 사용은 잘하고 있다. 세탁기에서 나온 빨래를 건조기에서 말리는 일을 계속하고 있지만 오늘처럼 햇살이 맑은 날에는 그 햇살 아래서 자연을 이용해서 빨래를 말리지 못함이 못내 아쉽다.


아무리 기계가 좋다 하더라도 자연만큼만 하겠는가. 이런 나를 딸은 어이없어 하지만 나는 우리 집 옥상이 그립다. 옥상에 올라가면 멀리 치악산이 보이고 그 아래로 이어지는 시골과 도시의 건물과 마을의 공원과 집 앞에 숲처럼 보여지는 가로수와 근린시설의 마을을 보고 싶다. 그 풍경 속에서 맑은 실개천은 아니더라도 세탁기에서 꺼낸 빨래를 툭툭 털어 옥상의 빨랫줄에 널고 싶다. 파란 하늘 아래로 비치는 햇살 속에서 멀리 치악산을 배경으로 가을바람에 흔들이는 우리 가족의 옷자락을 보고 싶다. 세상은 기술의 발달로 편리해져 가고 있지만, 나 역시 편리함에 길들여져서 그걸 잘 사용하며 좋아하고는 있지만 따사로운 햇살이 가득 담기는 가을의 한낮. 바지랑대에 기댄 빨랫줄이 그리운 날이다. 


내가 쓰지 못한 채 서쪽 하늘로 넘어가는 햇살이 너무나 아까운 날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운전하는 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