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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순미 Jun 17. 2022

아버지의 청소

아버지의 청소  



아파트에서의 아침은 햇살이 떠오르며 시작된다. 거실의 넓은 창이 동쪽을 향하고 있으니 햇살이 거실에 가득하다. 그와 더불어서 작은 먼지 한 톨이라든가 넓은 창의 작은 얼룩도 선명하다. 아파트 창의 얼룩이 삶의 자국이기도 하지만 청소를 할 수 없는 조건의 창이기도 하다. 어른어른 얼룩진, 형체를 무어라 말하기 힘든 자국들이 가득한 창문이다. 그걸 그냥 있는 듯 없는 듯 살아도 되는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받아들여도 되지만 남편은 그 얼룩들을 보고 참지 못한다. 유리창을 닦아야 된다는 말을 수시로 한다. 주택에 사는 우리 집 창문도 안 닦는 사람이. 


남편은 가정 일에 자상한 사람은 아니다. 집이 너져분하거나 찾는 물건이 눈에 뜨이지 않을 때는 내게 잔소리는 하지만 먼저 나서서 정리를 해주는 사람은 결코 아니다. 아침부터 바쁜 걸음으로 종종거려도 무심한 사람이다. 그런 남편이 아파트 창문틀에 올라섰다. 어디서 정보를 얻었는지 창문 청소도구를 인터넷으로 구입하고 그걸 이용해서 거실 창문 청소를 시작했다. 우리 나이로 네 살이지만 아직 세 돌이 되지 않은 손녀딸이 '할아버지 위험해"를 외친다. 아기가 보기에, 그간의 교육의 영향으로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미는 건 아주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자를 가져다 놓고 몸을 창문 밖으로 기울여 청소 도구를 이용해서 창문을 닦는다. 말린다고 말을 듣는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어른의 눈으로 볼 때는  큰 위험은 없어 보인다.  


남편의 모습 위로 시아버님의 모습이 비친다. 벌써 20년도 더 지난 일이다. 그때 우리는 아파트 9층에 살았다. 아버님은 평생을 단층 주택에서 사신 분이다. 목수로 일 하시면서 많은 집을 지었지만 자신의 집은 평생 짓지 못하신 분이다. 자식이 마련한 아파트의 창문이 그분이 보시기에는 청소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아버님은 아들 며느리가 닦지 않는 9층 아파트의 창문을 닦고 계셨다. 의자를 가져다가 올라가 창문틀 위로 올라서서 윗몸의 반을 창밖으로 내민 채 한 팔로 창문을 잡고 다른 한 팔로 열심히 창문을 닦고 계셨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아찔했다. 팔순이 넘은 아버님이 하실 일은 절대로 아니었다. 얼른 다가가 아버님의 몸을 잡고 제발 내려오시라고 다그쳤다. 며느리의 말은 순순히 들어주시는 아버님이 고마웠다. 위험하다고 하니 얼룩이 진걸 어떡하느냐고 하시던 아버님. 유리창을 닦는 남편의 모습 위로 비치는 아버님에 대한 기억은, 자식을 위한 일이라면 손수 찾아 나서는 바로 그 모습이다. 이제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경제적인 활동을 할 나이는 지나가고 있으니, 주변의 작은 일을 찾아 나서서 자식을 돌보아주고자 하는 아비의 모습이다. 


젊은 시절 최선을 다해 가족의 삶을 책임지면서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살았던 우리 시대는  지나갔다. 지금은 좀 더 다른 가치를 찾아 떠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다. 우리 때와는 달리 여자들도 적극 사회에 참여한다. 나 역시 내 딸과 며느리가 사회의 한 일원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 손녀와 함께 지내는 요즈음이다. 이 생활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른다. 아마도 내 힘이 사글어들을 때까지. 아니면 아이가 자라 혼자 힘으로 자기 일을 해결할 때까지가 될 것이다. 언제까지일지 기약이 없다. 우리 부부의 개인적인 생활을 접은 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부부가 딸의 집에서 지내는 건 아비어미로서 자식의 삶을 도와주고 싶기 때문이다. 아침햇살을 받으며 창문을 닦는 일도, 아이들 삶을 깨끗하게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다.


그때는 몰랐던 생각을 하며 옛날 시아버님 모습이 떠 생각해보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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