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순미 Jul 25. 2022

그녀의 미소

그녀의 미소     

                                         이순미    


"SNS에 제가 항상 웃는 것만 올렸지만 즐거운 것만 있지는 않았다." 방송에 나온 연예인이 지난 시간을 이야기하며 하는 말이다. 그렇다. 사람이 언제나 즐거운 날만 있을 수 있는가? 웃고 있는 날보다 더 많은 날들을 아파하며 지낼 수도 있는 게 우리의 생활이다. 하지만 어려운 시간을 지내고 나면 웃으면서 지나간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도 sns와 함께 하루하루를 보내던 날들이 있었다. 사람의 삶은 내가 원하는 일들이 이어지는 날보다는 내게는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들을 겪으며 살아야 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나에게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막연한 생각했던 일들이 느닷없이 뒤통수를 치며 다가온다. 아무런 방어막도 준비하지 못한 채 어리둥절함 속에서 허둥대며 느닷없는 일들을 맞아야 한다. 아무런 사전 지식도 없이 암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를 하며 집안에서 머물던 몇 년 전. 그때의 나는 스마트 폰 속의 세계와 소통하며 매일을 보냈었다.


가끔씩 지난 시간 속의 나를 찾아볼 때가 있다. 친구들과 소통하며 지내던, 몇 년 전의 카카오스토리를 열었다. 그 속의 내 사진들. 활짝 웃고 있는 몇 년 전의 나를 본다. 오래 지나지 않은, 불과 몇 년 전의 모습이지만 사진 속의 나는 많이 젊은 모습이다. 그때도 나이 들었다고 생각하며 젊음을 그리워했는데, 지금 다시 보니 정말 젊고 예쁜 모습이다. 사진 속에서 밝게 웃고 있는 그녀는 누구인가? 그녀가 바로 나인데도 내가 아닌 듯하다. 하루하루를 힘겹게 견디며 지내는 날이었는데 사진 속에서 웃는 모습은 밝고 화사해서.


거울 속으로 보이는 맨들 거리는 민머리가 싫어서 집에서도 가발을 쓰고 살았었다. 연로하신 친정어머니께 갈 때는 가발 위에 모자까지 쓰고 새빨간 립스틱을 바르며 내 모습을 감추며 살았다. 집에서 혼자 지내는 시간은 많았고, 스마트 폰 속의 친구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시절이지만 많이 외로웠다. 친구들이 보고 싶지만 면역력 약한 몸으로 외출을 할 수도 없었고, 내게 와 달라고 부탁하지도 못하던 시간이 계속되었다. 가끔씩 전화로 안부를 묻는 반가운 친구도 있지만 차마 안부전화마저도 하지 못하고 걱정하는 친구도 있었을 것이다.


가발을 쓰고 모자를 쓰고 거울 앞에 서서 웃어 보았다. 그 무렵 카카오스토리가 한 창 유행일 때다. 거울 속에 비친, 잘 다듬어진 머리카락의 가발 위에 모자를 눌러쓰고 웃고 있는 거울 속의 그녀를 찍었다. 사진을 카카오 스토리에 올렸다. 사진은 나를 알고 있는 모두에게 보내는 나의 메시지였다. “걱정하지 말아요. 나 이렇게 잘 지내고 있어요. 곧 만날 수 있을 겁니다.”라는 마음을 담은 사진이었다. 웃고 있는 내 모습을 보내면서 걱정하는 친구들을 안심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보여주기 위함의 위선이 아니었다. 좀 더 예쁜, 건강한 나의 모습을 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가끔씩 사진놀이는 계속되었고 계속되는 사진놀이로 어두웠던 얼굴에 웃음이 조금씩 자주 찾아왔다. 거울 속에서 웃고 있는 얼굴이 과연 내 모습일까 싶은 날도 있었다. 독한 약 기운 속에서도 내가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웃고 있었으니까.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처럼, 계속되는 사진 놀이 속에서의 미소는 조금씩 내일을 다시 찾을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싹트게 했다. 나이가 들면서 외면의 아름다움은 사라지겠지만 마음의 아름다움을 위한 노력은 필요하다. 사람의 마음이 늘 일관된 것은 아니어서 시시때때로 어제와 다른 생각을 하는 오늘도 많다. 어제의 희망이 하룻밤 사이에 시들해져서 맥을 놓는 경우도 많지만 거울을 보며 자주 웃어주는 일은 희망을 보는 날을 많아지게 만들었다.


방송에 나온 그녀도 어려웠던 지난 시간을 잘 극복했다고 말하며 웃고 있다. 나도 옛 사진을 다시 꺼내 봤다. 이제는 옛이야기가 된 사진을 꺼내 보니 참 대견한 내가 그 속에 있다. 매일을 견뎌내야 하는 시간 속에서도 웃을 수 있었다니. 사람이 늘 한 모습으로 하나의 역할만하면서 사는 건 아니다. 환자이면서도 자식이고 아내이고 엄마로 살아야 했고, 사회 속에서 관계 맺은 다양한 역할의 나로 살아야 한다. 역할에 따라 주어진 이름의 탈을 쓰고 살고 있고, 그 모습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달리 보일 수 있다. 사진 속의 미소는 견디기 위함의 시간이었을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 안부를 전하려는 미소였지만, 웃음이 많아지던 시간만큼 건강도 빨리 회복되었으리라 믿는다.

지금은 아쉽게도 그 미소를 많이 잃어버렸다. 물론 지난 시간의 어려움을 잘 극복하였기에 더 아름답게 남은 지난 시간이겠지만 오랜만이 다시 찾아본 사진 속의 나는, 웃고 있는 그녀는 여전히 예쁘다.


                     



작가의 이전글 아버지의 청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