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남편과의 외출에서 국수 먹을 생각이 전혀 없는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집에 가서 라면 먹으라는 말을 해 버렸다. 남편은 라면도 무척 좋아해서 마트에 가면 라면 몇 묶음씩 사 오는 사람이다.
"이 사람아, 개운한 국물맛이 좋은 국수 한 그릇 먹겠다는데 라면하고 같아?"
국수를 무척 좋아하는 남편의 목소리가 쨍하니 들린다. 그 말끝에 평소에 젼혀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던 신혼시절이 떠 오른다.
입덪으로 힘들어할 때 뜨끈한 칼국수 한 그릇 먹고 싶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국수가 먹고 싶다는 내 말에
집 앞에서 아들을 돌보며 동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남편이 국수는 무슨 국수냐며 라면이나 끓여 먹으라고 했다. 느끼한 라면 냄새도 맡기 싫은데 라면을 먹으라 하니 괜히 서럽던 날이었다. 그날이후 그 기억은 잊었고 이후에 전혀 다시 기억한 적이 없는데 느닷없이 그날의 기억이 떠 올라 어리둥절하다. 아니, 내가 이런 걸 다 기억하고 있었다고? 스스로 놀라면서 드는 의문은 나는 왜 국수를 싫어하는가였다.
어린 시절은 지금과 다른 시대를 살았다. 내가 태어난 곳은 지금보다 훨씬 후진국의 어느 농촌지역이었다. 깡보리밥은 먹었던 기억이 있지만 보릿고개를 넘기 위해 애쓰던 기억까지는 가지고 있지 않다. 아무튼 지금보다 훨씬 어려운 경제를 가진 국가의 농촌에서 살았다. 먹을거리를 집에서 해결했던 시절이다. 어머니는 국수를 잘 삶았고, 아버지는 국수를 잘 드셨던 기억이 난다. 나 역시 국수를 좋아했다. 하얀 밀가루를 반죽해서 반죽 덩어리를 너른 판에 얹어 놓고 홍두깨로 누르며 손으로 둥글 둥글 쓱쓱 싹싹 밀어내면 한참 후에는 방의 한쪽을 다 차지할 만큼 커다랗고 둥글고 얇은 국수 반대기가 되었다. 종이처럼 얇은 그걸 차곡차곡 접어서 칼로 썰고, 호박을 채 썰어 함께 끓여낸 구수한 칼국수를 김치와 함께 먹으면 정말 맛있었다.
결혼을 하고 나니 남편도 국수를 아주 좋아했다. 밀가루 반죽을 해서 칼국수를 만든 적은 없지만, 마트에서 파는 소면을 삶아 멸치국수나 잔치국수를 만든다거나 시원한 콩국물에 오이채를 송송 썰어 고명으로 얹는 냉국수, 갖은 채소를 썰어 고추장양념과 버무린 비빔국수..... 이런저런 국수를 참 많이도 해 먹었다. 거의 매일 국수를 먹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런저런 반찬을 만들기 위한 수고도 덜어주던 국수였다. 세월이 흘러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국수가 싫어졌다. 언제,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냥 국수가 싫어서 남편을 위해 국수를 삶고 나서도 마주 앉아 그는 국수를 나는 밥을 먹는 경우가 많아졌다.
국수를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가 잦은 위장장애 때문이다. 만성 위염을 가지고 있어 늘 먹는 일에 신경을 쓰고 산다. 소화가 잘 되지 않는 밀가루를 줄이려는 나의 의도된 식습관이 국수를 멀리하는 이유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외출 중에 남편이 국수를 먹자는 말에 집에 가서 라면이나 먹자는 말을 하면서 느닷없이 떠 오른 오래전 기억. 임신 중에 국수가 먹고 싶다는데 라면이나 먹으라고 퉁명스레 말하던 그날은 이미 삼십 년도 더 지난 이야기인데 느닷없이 그 기억이 난다. 평소에 단 한 번도 기억하지 않았던 그 이야기가 내 잠재의식 속에 있었단 말인가? 스스로 깜짝 놀랐다. 혹시, 그날의 기억이 무의식 속에서 국수를 거부하도록 내 생활을 지배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시콜콜한 걸 오랜 시간 담아두고 있는 무의식 속의 기억이 무서워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오늘의 나는 옛 경험 속에서 만들어졌을 테니까.
*****
그날은 결국 국수를 먹었다.
오늘은,
점심 무렵에 마트에 가서 라면을 사 가지고 왔다.
나는 평소에 라면도 먹지 않는다.
항암 치료 후에 음식을 조심하기 위해 생겨난 버릇이다.
면 종류는 다 좋아하는 남편은 라면도 무지 좋아한다.
"웬일로 라면을 다 사 왔어?"
그 물음에 중얼중얼하며 선명한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라면 두 개 끓여서 맛있게 익은 김치 한 접시 놓고 호로록~~ 함께 먹어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