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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순미 Jun 04. 2023

세 살 버릇

지키지 못하는 약속

생각해 보면, 아주 오래전 여고시절 소녀였던 나를 생각해 보면 그때도 나름대로의 작은 계획들이 있었던 것 같다. 사람들과 어울려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혼자 있는 시간을 즐겼던 조용한 아이였던 나는,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긴 시골길을 혼자 걸어가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때 많은 생각 중에 하나가  산문 한편 써서 학생지 독자투고란에 응모해 볼까? 였었다. 여고 삼 년은 빨리 지나갔고 생각만 많았던 조용한 소녀는 학생지에 우편물을 보내지 못했다. 직장인이 되어서 여성지를 읽으면서, 주부가 되어 여성프로그램 방송을 들으면서 수많은 독자투고를 읽고 들으면서도 작은 산문 한편 보내지 못했다. 마음은 인쇄된 내 글을 읽어보거나, 목소리 좋은 아나운서가 읽어주는 내 산문 한편을 꿈꾸다 보니 시간만 흘러갔다.  


중년이 넘어 암 투병생활을 했고, 치료가 끝난 후에도 몸은 편하지 않아 늘 힘들다. 수없이 병원을 오가고 먹어야 하는 약도 많았고 늘 통증으로 지내는 나날이었다. 언제 병원을 갔었고, 어떤 검사를 했고 약을 먹었으며 그때의 증상들은 어떠했으며 내가 먹고 마시고 움직이는 음식과 운동의 형태에 대해 기록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적어야지. 적어야 돼. 적을 걸 참고해서 내 몸을 잘 다스려봐야지. 그리고 그 기록을 참고로 내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나 증상에 대처해야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노트를 샀다.  


노트에 하루 일과의 짧은 메모를 남기는 일은 쉬울 것 같다. 그러나 그게 너무나 어렵다. 작심삼일. 하루 이틀 삼일.... 잘 적어오다가 메모의 시간을 깜박 잃어버린다. 아니, 조금 있다가 적어야지, 하다 보면 며칠이 흐른다. 지나간 시간을 더듬어 보지만 기억이 이리송해지면 기록을 포기하게 된다. 다시 지난번과 같은 증상이 몸에서 나타나 언제 약을 먹었더라, 그때는 병원에서 어떤 검사를 했더라, 하고 노트를 뒤저여보지만 며칠의 기록 후에는 그냥 백지다.  


스마트폰을 이용하기로 했다. 비공개 계정을 하나 만들어서 내 이야기를 적기로 했다. 내게 곡 필요한 건강에 대해 적어보기로 했다. 스마트 폰이야 노트와 달라 항상 내 손안에 있으니 그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잘해 보기로 했다. 언제 어디서나, 하물며 잠자리에 누워서라도 하루를 돌아보며 내 몸 이야기를 적는다는데 어려울 게 있을까? 머리가 무겁고 목이 아프니 또 병원에 가야 하나? 지난번 병원행은 언제였더라? 스마트 폰을 들여다보니 많은 날들이 지나가는 동안의 기록이 없다. 노트도, 스마트 폰도 내 마음처럼 활용이 되지 않는다.

 

살다 보면 건강의 문제 외에도 생활 속에서 부딪치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어려움은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고 막막하게도 한다. 그 여파로 미움도 생기고 고집도 생기고 자포자기나 포기도 생긴다. 또 몸에서 이상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마음의 어려움을 씻어내는 데는 방어기제가 필요하다. 상담이나 친구와의 수다나 다정한 사람들의 위로로 어려움을 풀어낼 수도 있지만 일기 쓰기도 좋은 방어기제가 될 것 같다. 혼자 쓰는 비밀일기는, 내 속을 고스란히 표현하면서도 남에게 들키지 않으니 흉도 남지 않을 것이다. 응어리를 풀어내는 일에는 일기 쓰기가 참 좋을 것 같다.  


좋으면 실천해야 한다. ㅋㅋ~ 그저 웃을 수밖에 없는 경우는 혼자 쓰는 일기장에서도 일어난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긴다더니 여고시절에 산문 한편 써서 학생지에 투고하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지 출판사에 산문 한편 보내지 못한 내 젊은 날의 버릇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순전히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 나만 볼 수 있는 일기 쓰기가 몇 번의 실천 후에 다시 도화지가 되어있다. 할 말도 많고 생각도 많은 매일이지만, 단 몇 줄의 일기라도 쓰는 일이 이다지도 어렵단 말인가. 성공을 하는 사람은 메모의 습관이 좋다는 말을 들으며 몇 줄의 메모 정도야 누구나 할 수 있지. 하는 생각만 했지 실천을 하지 못한다.  


노트를 펼쳐놓고, 다시 컴퓨터 화면을 보고 앉아 오늘 만이라도 몇 줄 남기려 했다. 그러나 이게 또 뭐 대단한 작업도 아닌데 뭘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 조금 전까지 생각은 많았는데. 생각정리가 되지 않다가 조금 전 내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머리가 깜깜해진다. 잘하려 하지 말아야 되는데. 잘 써진 산문 한 편을 바라지 말고 솔직하게 그저 손 가는 대로 솔직한  마음을 써야 하는데 그게 잘 되지 않는다.  


저 먼, 여고시절에 독자 투고란에 산문 한편 보내고 싶었던 그때도 어쩌면 나는 잘 쓰인 산문 한편 기다리다가 끝내 내 꿈을 이루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소설도 아닌 일상의 작은 생활이야기인데도 작품처럼 쓸 수 없다고 의기소침해서 꿈만 꾸었던 것 같다. 글이라는 게 순수한 마음으로 솔직하게 적으면 되는데, 혼자 쓰는 나의 일기장에 그저 그날의 생활 이야기 한편 적으면 되는데 여전히 일기 쓰기가 어렵다. 다시, 편안하게 일기 쓰기를 해 봐야지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생각만 많은 내 앞에 도화지만 가득 쌓아 놓을 것 같다. 더 나이가 들어  80대가 되어도 이런 생각 속에서 살까?  추진력이나 결단력 없는 나의 성격은 어린 날에 만들어진 나의  고질병인가 보다.


속담에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더니 내가 그 주인공으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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