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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순미 Jun 11. 2023

 때로는 눈물이 필요하다

- 혼자 쓰는 일기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웃고 있었다. 사람들은 취향이나 성격에 따라 자주 가는 곳들이 있다. 그녀와 나는 아마도 닮은 부분이 있는지 이런저런 장소에서 몇 번 마주쳤다. 어느 날 운전을 하지 못하는 그녀와 내가 한 차를 타게 되었다. 서먹하던 분위기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러워지고, 우리 그때 어디서 몇 번 만나지 않았냐며 이야기가 오가고 서로의 나이를 물었다. “우리 갑장이네.” 까르르 웃었던 게 처음 본 그녀의 웃음이었다. 나 역시 웃음이 많지 않은 사람인데 그녀도 얼굴에 늘 우울이 배어 있었다. 이후 마주치면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는데 언젠가부터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알만한 사람들에게 그녀의 안부를 물으며 혹시 이 고장을 떠났냐고 하면, 아니라고 아마 있을 거라는 애매한 답변만 돌아왔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우연히 그녀를 만났다. 도서관 강의실에 앉아 있는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반가워서일까?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녀의 생활이 변했는지도 모른다. 강의가 끝난 후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갔다. 밥을 먹고 후식으로 나온 차를 마시는 동안 그녀의 끝없이 이야기를 한다. 그녀는 말이 많아졌다. 웃음이 가득한 얼굴이다. 무엇이 그녀를 변하게 했을까? 알 수 없다.   

  

도서관에서 들었던 강의의 주제는 작업실이었다. 일을 위한 작업실이 아닌 나만의 공간, 오로지 나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작은 방을 갖고 싶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군가는 쉽게 나의 공간을 가질 수 있겠지만 여유롭지 못한 대부분의 주부에게 작업실은 먼 꿈나라 이야기다. 그녀에게도 작업실이 없다. 작업실은커녕 시어머님과 한 방을 사용하는 아이를 생각하며 안쓰러워했고, 자기는 시도 때도 없이 제집처럼 드나드는 시누이들의 시선에서 잠시도 벗어날 틈이 없어 답답하다고 했다. 문 닫고 방에 앉아 있을 틈이 없다는 그녀가 시집살이 때문에 많이 울었다고 한다.     


그녀가 울었다는 말에 부러움이 생긴다. 눈물이 없는 나. 왜 울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가슴에서 느껴지는 덩어리에 눌려 숨쉬기조차 힘들어지던 지난 시간들. 조금이라도 눈물을 흘리면서 엉엉 울었다면 나는 병이 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암을 진단받았을 때도, 암 투병의 고통 속에서도, 머리카락 하나 없는 거울 속 내 모습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한 메마른 마음 때문에 아직도 우울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집 가족들에게 서운함이나 요구사항을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섭섭해하지만 말고 억울하면 눈물로라도 풀어버려야 하는데 말이다.     

 

그녀가 울었다는 말에 다른 친구가 생각난다. 친구의 동생이 암에 걸렸다. 동생에 대한 걱정을 내게 하소연하는 친구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가 "그래서 울었어?"하고 물으니 "그럼 엄청 울었지.” 하고 말한다. “그래 잘했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슬프면, 마음 아프면, 억울하면 울어야 한다. 울지 못하면 그 설움이 또 다른 병을 만들 수 있다. 그걸 알면서 나는 왜 울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그녀의 이야기다 계속된다. 목사님이나 신부님 앞에서 우는 사람이 많단다. 자기네 목사님은 우는 아주머니들에게 울지 말라고 말하는데, 그녀는 그런 목사님을 향해 우는 사람은 울게 내버려 두시라고 말했단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다. 울고 싶을 때는 마음껏 울어야 하지 않겠는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상대방을 이해한다는 건 어렵다. 이해는 아름다운 오해일 수 있다. 내 경험만큼의 범위 내에서 상대를 내 식으로 오해하는 게 이해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각기 다른 환경과 생각 속에서 사는 사람이 당사자가 되어서 이해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같은 부모 같은 환경에서 자란 형제자매도 생각이 다르고 이해의 폭이 다른데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냥 다 이해했다고 스스로 자신에게 주장하는 합리화다. 아주 조금 어느 부분의 한구석이 이해될 수는 있는데 그걸 가지고 ‘난 다 이해한다’는 말은 또 다른 상처가 될 단서를 만드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해가 어려운 세상에서 필요한 건 눈물이다. 작품으로 아픔을 승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방어기제가 눈물이다. 아무에게도 해를 주지 않는 빈 공간에서 그저 엉엉 울어서 엉킴을 풀어버리는 일은 필요하다. 뭉쳐진 가슴의 덩어리를 밖으로 쏟아내는 일이 울음이다. 무언가 잘못 먹어서 배가 아플 때 설사를 해 버리면 속이 시원한 것처럼 마음의 응어리 역시 배설이 필요하다. 그 배설이 수다일 수도 있지만 그 수다가 때로는 오해로 인해 아픔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면 그냥 울어버리는 일도 마음을 푸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게다.      


그녀는 많이 울었다고 한다. 그 순간 그녀가 부러웠다. 얼마나 시원했을까? 시부모 때문에 가슴앓이가 많았던 내가 그녀를 이해한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이해라는 말을 빌어서 그녀를 오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울어서 그녀는 시원했을 거야,라고. 울어서 그녀가 시원했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울음이 근본적으로 해결이 어려운 문제에 대한 시각을 바꾸는 계기가 되어서 마음이 편안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또한 내가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울었다는 그 말에 울어보지 못한 나는 부러움과 함께 그녀의 가슴이 뭉쳤던 응어리는 풀렸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도 살아봤으니 너의 시집살이 이해해, 하는 마음으로.  

   

이해를 가장한 오해 속에서 우리는 마주 보고 웃었다. 수다스러운 이야기로 위장해 속내를 풀어버리며 웃었다. 어찌 되었든 그녀의 얼굴은 몇 년 전보다 많이 밝아졌다. 60이 넘어서도 80이 넘은 시어머니와 그 어머니 때문에 제집 드나들듯 드나드는 시누이들 틈에서 편히 앉아 있을 방 하나 갖추지 못하고 부엌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말이 가슴 싸아하게 아파 오지만 우리는 마주 보고 웃었다. 그건 눈물 때문에 속이 풀린 그녀와, 눈물이 없었던 내가 나와 비슷했던 처지의 그녀가 흘린 눈물이 부러워서 웃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때로는 눈물이 필요하다. 어른이 어린아이처럼 엉엉 우는 일도 있을 수 있다. 나만의 공간도 없고, 혼자 생각에 잠기거나 울 수 있는 공간 하나 없고, 울 수 있는 시간조차 허락받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가슴을 삭일 공간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 눈물이 없어서, 슬펐던 시간에도 울지 못했던 나. 내가 애처롭다. 왜 풀어버리지 못하고 참고만 살려고 했는지.     


많이 맑아진 그녀를 보면서, 암 진단을 받고 울었다는 친구와 친구의 동생을 생각하면서, 그 울음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하는, 아직도 응어리진 가슴이 답답한 나처럼 살지 않기를 바란다. 세상의 모든 여자들에게 울고 싶을 때 마음껏 울어버리라고 말한다.   

  

살면서 때로는 눈물이 필요하다. 그건 나를 치유하는 좋은 방어기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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