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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순미 Sep 16. 2023

소금쟁이

비문증



         

 

어린 시절 농촌에서 살았다. 물관리가 쉽지 않았던 옛날에는 논두렁 가장자리에 작은 연못이 있는 곳이 있었다. 연못의 물이 고여 있었고 그곳에는 잠자리나 소금쟁이같이 물과 더불어 사는 곤충들이 있었다. 여름에 비가 내린 뒤, 길을 걷다 보면 물웅덩이를 만난다. 늘 있던 건 아니고 내린 비로 인해 생긴 일시적인 물 고임의 자리다. 그 작은 물웅덩이에 소금쟁이가 보일 때가 있다. 가냘픈 몸통에 가늘고 긴 다리를 가지고 마치 날 듯이 빠르게 물 위를 움직이는 소금쟁이다. 참 신기하다. 주변에 연못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일시적으로 생긴 물웅덩이 위를 걷는 소금쟁이는 어디서 온 걸까?


하늘이 파랗고 멀리 치악산 정상인 비로봉의 탑이 보일 만큼 선명한  이 년전 어느 가을날이었다. 모처럼의 한가한 연휴에 여기저기서 들리는 코로나19와 감기 독감 소식으로 인해 건강을 염려해 여행은 떠나지 못했지만 산책이라도 할 요량으로 집을 나섰다. 물이 흐르고 숲은 아니지만 나무와 들풀과 들꽃이 이루어진 원주천을 목표로 산책을 나섰다.


걷고 있는데 눈앞에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무심히 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어 보지만 살짝 움직인 머리카락이 다시 위치를 바꿔 살랑인다. 이상하다. 이게 뭐지? 뭔가 헛것이 보이는 것 같다. 양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가다듬고 고개를 들고 눈동자를 돌려본다. 어렴풋이 그림자가 일렁인다. 뭐지? 아마도 이 며칠간 너무 무리했나 보다. 한동안 비웠던 집에 일거리도 많았고, 간소하게나마 명절의 차례상을 차렸고, 명절 전에 치른 집안 행사의 손님 접대로 모임이 있었던 후라 몸이 피곤해 눈이 침침한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산책을 하고 돌아왔다.


피로를 낮출 겸해서 낮잠을 자고 일어났다. 소파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데 이게 뭐지? 머리카락이 아니라 모기인듯하기도 하고, 날아다니는 하루살이인듯한 무언가가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한다. 자세하게 그 움직임의 모양을 특정할 수가 없다. 내 눈동자의 움직임에 따라 눈앞의 어느 공간에서 계속 움직이면서 뚜렷한 형체를 보여주지 않는 곤충이 한 마리 등장했다.


안과를 찾았다. 전날 밤, 이게 무슨 현상인가? 내게 또 어떤 병이 찾아오는가? 불안감에 휩싸였다. 무엇보다 먼저 병원 진단이 필요했다. 검색을 통해 비문증이라는 낱말을 발견했다. 나이 들어가면서 있을 수 있는 증상이라는 긍정의 정보도 얻어냈지만, 혹여 모를 나쁜 병이 숨어 있어서 그럴 수도 있다는 부정의 정보도 함께 얻었다. 병원은 손님들이 가득했다. 연휴가 끝나면서 지난해부터 세상을 뒤엎은 역병인 코로나 19의 환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시점이라 사람 많은 곳을 피하고 싶으나 선택의 여지가 없이 안과 환자들 틈에 자리를 잡고 기다려야 했다.


이어지는 몇 가지의 검사를 받으며 이건 무슨 검사인지 궁금했으나 말이 없는 간호사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검진으로 암을 통보받던 지난 날이 떠오르며 마음은 무겁고 불안하다. 눈앞에 보이는 물체가 있으니 다시 추가 검사로 이어졌다. 움직이는 물체는 내 눈동자의 움직임에 따라 이동하기 때문에 정확한 형체을 볼 수는 없다. 의사 앞에 앉아 질문과 답변이 오가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알았다는 듯 이야기한다.


“이건 눈 속의 현상입니다. 이걸로 수술하지는 않아요.”


의사는 이미 이런 현상에 대해 나보다 더 정확하게 알고 있을 테다. 이건 안과 환자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덤덤하게 말한다.


이렇게 진료가 끝났다. 뒤에 있는 많은 환자를 의식해서인지 나도 별다른 질문 없이 진료실을 나왔다. 아니 어쩌면 검색을 통해 알아낸 정보가 정답이라고 내가 믿어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진료비를 계산하면서 간호사에게 물으니 증상은 없어질 수도 있고 3개월 동안 없어지지 않으면 계속 그럴 수 있단다. 정답 같지 않은 해답 중에 하나다. 가만히 앉아 흔들리는, 정확한 형체를 보여주지 않는 물체를 따라 눈동자를 굴리다 보니 마치 한 마리 소금쟁이가 물 위를 타고 빠르게 움직이는 것 같다.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비문증 있다고 하지 않았어? 괜찮아.?”

친구는 벌써 5년 전에 그 증상이 생겼단다. 지내다 보니 이제는 그 증상과 함께 잘살고 있다고 한다.


“나더러 앞으로의 생을 이렇게 살라고?”


느닷없이 소리를 질렀다. 울고 싶은 마음이다. 나이 든다는 게 뭔지. 가족과 지인들에게서 종합병원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여러 병원을 드나들고 있으니 내가 안고 살아야 하는 증상이 도대체 몇 가지인가? 약 봉투는 많아지고 시간이 지나면서 불편한 증상들이 자꾸 더해지니 나오는 건 한숨뿐이다.


하릴없이 걸었다. 걷다가 누군가를 만나면 건강을 위해 하루 만 보를 걷는 중이라고 웃으며 말을 하지만 마음은 어둡기만 하다. 몸 안의 새롭게 나타나는 증상이나 현상이 참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지난밤 내린 비로 없던 물웅덩이가 생겼다. 하늘의 구름이 비치는 투명하고 맑은 물 위에서 가늘지만 긴 다리를 움직여 빠르게 물 위의 공간을 타는 듯한 소금쟁이가 한 마리 있다. 어디서 왔을까? 주변에 연못도 없는데 느닷없이 마을의 한 가운데 생긴 웅덩이에서 소금쟁이가 물을 타고 있다. 빠르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심히 움직이는 소금쟁이가 내 눈 속에 사는 그 현상과 같은 모습이다. 잡히지도 않으면서 눈동자의 움직임에 따라 허공의 어느 지점에서 작은 몸과 긴 다리로 자유롭게 움직이는 내 눈 속의 곤충과 닮았다. 물 위의 소금쟁이가.


비가 내린 후 마을의 길가에 생긴 작은 물웅덩이에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소금쟁이가 물을 타듯이 내 눈앞에서 소금쟁이 한 마리가 쉬지 않고 움직인다. 지금도. 나이가 든다는 건 뭘까? 불편한 증상들을 보듬고 안고 다독이면서 견디며 살아 내야 하는 일들이 많이 지는 현상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지금은 다정한 협상이 필요한 시간이기도 하다. 나를 찾아온 소금쟁이다. 원하지 않았지만 내게로 왔으니 앞으로의 삶에서 보듬어 안고 살살 달래가며 살아야 할,  버리고 싶지만 버릴 수 없고 버려지지 않는 소금쟁이에게 부탁한다.


“여기서 살아도 좋아. 그러나 가족을 더 늘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 부탁 들어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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