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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넷 Nov 17. 2019

난 이제 지쳤어요, 땡벌.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몸도 마음도 지쳤다. 아니, 다친 거 일지도. 업무적으로만 봤을 때는 지금이 나의 전성기 아닐까?

참여했던 제안도 운 좋게 좋은 성과가 있었고 담당하고 있는 업무에 대한 고객사들의 만족도도 좋은 편이다. 이 정도면 꽤나 즐길만한 오피스 라이프 아닌가.

 

그런데 난 한 달 내내 꼭 생리를 앞둔 사람 마냥 예민 초조 모드다. 물론, 고맙게도 나의 생리는 언제나 그랬듯 시간 약속을 잘 지켜주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생리를 앞둔 고슴도치 같다고 할까.

 

누구 한 명 걸리기만 해 봐, 나 건드리기만 해봐 하는 마음으로 회사를 다는 심정. 이 회사가 왜 5년 근속 직원에게 안식 휴가를 주는지 이제 서야 감이 온다.


그 어떤 노랫말처럼 난 이제 지쳤다. 기다리다 지쳤다. 혼자서는 이 야근이 너무너무 길다. 이 밤, 내 상처를 깊게 만든 몇몇 사건이 떠올라 이 밤이 더 길게 느껴진다. 내일 출근이 멀게 느껴진다.


(출처 : 드라마 '미생')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드디어 대망의 D-DAY가 지났다. 두 달을 준비해온 A사의 브랜드 론칭 기념 기자간담회.


행사 시작 이틀 전, 팀원 7명의 R&R을 정했다. 나와 메인을 담당하고 있는 후배 그리고 대리를 제외하고는 행사 프로그램에 대해 1도 모르고 있으니 각 시간별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해야 하는지 액션플랜을 준비해 내부 공유했다.


하지만 팀원들의 불안감이 터져 나왔다. 난 자세하게 쓴다고 썼지만 그들 입장에서는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지 않은 것이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남의 고객사다 보니, 브랜드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상황인데 불안한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이때 첫 단추가 잘못 끼어졌다. 난 그들의 불안감과 질문을 내가 해소시키기보다 각자 해결하도록 컨택포인트를 넘겼어야 했다. 내 딴에는 팀원들에게 일을 떠넘기는 것 같아 오롯이 내가 확인하고 일일이 알려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건만. 숟가락으로 밥 떠먹여 주던 내 처사가 행사 당일 참사로 이어질 줄이야.  


행사 당일. 아침 6시부터 진행상황을 체크했다. 차곡차곡 진행되었고 리허설과 사진행사가 동일하게 함께 시작될 무렵 내 휴대폰은 발작을 일으키는 것 마냥 진동을 멈추지 않았다.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을 비롯 끊임없이 발생하는 돌발변수에 대해 어떻게 해야 될지 나에게 확인하고 묻기 위함이었다.


고객사의 요청으로 현장 도면에 이름까지 박아가며 R&R 파일을 작성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그 자리에 없었기에 현장의 R&R은 무용지물이었던 걸까. 아니다. 누구도 그 일을 '왜' 해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하는 건지 알지 못했기에 현장의 문제를 피하기 급급했던 거다.


난 받지 않았고 받을 수 없었다. 당장 1시간 뒤 예정인 행사의 기자간담회 리허설을 해야 했으니까. 내가 같이 리허설을 하고 있는 이들은 불을 언제 키고 언제 끌지조차 컨펌 요청하는 꼼꼼함의 극치를 달리는 일본 클라이언트다.


결국 난 리허설을 하는 30분 동안 12명의 사람에게 37개의 부재중 전화를 받았고 행사를 종료할 때까지 총 100개에 가까운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행사는 고객사가 만족하며 대외적인 성과는 좋았지만 이는 내부 팀원들의 희생이 뒤 따랐다.


팀원들은 처음 보는 고객사에게 부당한 업무 요청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책임이 어디까지 인지 모르니 대응하지 못해 억울했다. 고객사의 업무 담당자가 그들의 역할을 하지 않았고 기자에게 불필요한 욕을 대신 먹으며 욕받이로 전락했으니 울화가 치밀었을 것이다. 이해한다.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지만 그러나 난 내가 어떻게 했으면 더 나은 결과가 있었을지 잘 모르겠다. 알면서 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정말 모르겠다. 오히려, 난 그 과정 속에서 느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는 걸.


심지어 나에게 억울함을 호소하거나 잘못했다고 하는 이는 하나도 없다. 내가 가장 힘들 것이고 가장 고생했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고 한다. 고객사와 파트너사도 모두 만족한다. 심지어 네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할 수 없었을 거라며 끊임없이 비행기를 태워준다. 그럴수록 목에 가시가 걸린 것 마냥 가슴이 쓰리다. 이 마음속의 부채감은 어디서 왜 오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이 불안감이 아니라 현실이 될까 두려워서 그런 걸까.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나와 함께 일하지만 아무도 함께 일하지 못하는 것 같은 이 상황. 아무도 내 일을 덜어주지 못하는 것 같고 서로가 불만족하며 감흥도 결과도 없는 그런 상황의 반복. 그게 불안한 거 아닐까?



두렵다. 이렇게 가다가 정말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고 말하게 될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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