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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넷 Nov 17. 2019

임신했지만 일은 잘하고 싶어

임신 6개월, 무임승차와 오버 페이스 사이의 줄다리기

연봉협상과 인사 발표 후, 상사에게 임신을 고했다.


상사는 1초 정도의 정적 후, 축하한다는 말을 건넸다. 축하한다는 말과 단축근무를 비롯해 힘든 일이 있다면 언제든 이야기해줄 것을 주문했다. 내가 팀의 첫 유부녀이자 임신 여성인만큼 그는 아직까지 한 번도 이와 관련한 경험이 없는 것에 걱정이 앞서는 듯했다.


‘축하한다’는 그의 말에 안도했다. 드라마에서 보던 것처럼 긴 정적 이후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나를 지배했나 보다. 물론, 그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되는 건 항상 ‘사람’이 아니라 ‘상황’이니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찌할 수 없었다.


임신소식을 유난스럽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임신은 내 개인의 일이기 때문이다. 가능한 드라이하게 알릴 수 있는 방법이 무얼까 고민하다, 단톡 방에 간단하게 메시지를 남겼다.



‘안녕하세요, 르넷입니다. 다름 아니라, 제가 임신을 하게 되어 메시지를 드립니다! :) 가능한 업무에 차질 생기지 않도록 하겠지만, 많은 도움 부탁드립니다. ^^’



멋쩍은 마음에 겨우 엔터를 누르고 자리를 뜰까 하는 찰나에, 팀원들의 ‘우와’ 하는 소리가 파티션을 넘어왔다. 단톡 창과 자리로 축하인사가 시작된 덕분에 내 민망함은 감출 수 없었고 퇴근시간이 지나서야 황급히 사무실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의 공백을 염려하는 건 나 밖에 없었다는 생각에 모처럼 퇴근길 발걸음이 가벼웠다.





# 임신 6개월, 무임승차와 오버 페이스 사이의 줄다리기


팀원들의 배려 덕에 임신 초기 단축 근무를 했다. 법적으로는 권리라 하지만, 주변 팀의 임산부들을 보면 당연한 대우는 아닌 것 같았다.


우리 회사는 여성이 80프로고 부장, 임원급도 여성의 비율이 더 높다. 해서, 여성이 다니기 좋은 직장으로 유명하고 관련 표창도 받았다지만 어떤 조직도 당연한 권리는 없다. 스스로 돕는 본인과 팀원의 처지를 생각해주는 동료가 있어야 서로의 권리는 지켜진다.


그렇다고 나도 내 단축근무에 백프로 만족한 것만은 아니다. 퇴근을 빨리할 뿐 업무량이 줄어드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집에서 좀 더 편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다는 것과 퇴근시간 전 덜 붐비는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할 따름이었다. 미팅이나 행사라도 잡혔다 하면 그나마도 야근을 하게 되는 식이었지만 대행사 구조상 한계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임신을 이유로 무임승차는 스스로도 싫었고 배려해주는 팀원들에게 짐이 되기도 싫었다.


그쯤 해도 나는 그러려니 했다. 냉정할 수 있지만 임신이라고 내가 한 달에 받는 월급이 깎이는 것도, 직급이 내려가는 것도 아니니 기존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믿었다. 무임승차는 절대 싫으니 차라리 오버페이스를 택하게 된 꼴이랄까.



그러던 중, 임신 6개월. 무임승차와 민폐 사이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고객사가 새로운 브랜드를 오픈하는 것을 알리고자 기자간담회를 개최했다. 국내에서는 경험하기 쉽지 않은 유럽풍의 디자인과 분위기를 가지고 있어 기자들이 이미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관심의 대상을 홍보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지만, 임신 중기의 나에게는 힘에 부치기도 했다.


기자간담회 전날이었다. 건물의 이곳저곳을 보여주기 위한 투어 프로그램이 있었고 담당자로서 나는 그 코스를 미리 볼 필요가 있었다. 해서, 고객사 담당자들과 함께 건물을 둘러보려는데 이게 웬일인가.


엘리베이터가 고장이다. 오픈 전이라 전기공사를 비롯한 막바지 정리공사가 한창이어서였을까. 7층에서 11층까지 그리고 16층 23층을 봐야 하는데 엘리베이터가 안된다니?


잠깐의 망설임 끝에 사람들은 계단으로 향했다. 시간이 없으니 당연한 선택이긴 한데, 나에겐 아니다. 나는 출퇴근 지하철도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임산부 아닌가.



(이 계단은 제가 오른 실제 계단이 아닙니다.)

내색하지 않고 잠시 머뭇거리다 그들을 따라 계단을 올랐다. 11층에 오르자 고객사 담당자는 그제야 뒤처진 나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며 말을 건넸다.


"죄송해서 어떡해요. 무리하지 마시고 천천히 올라오세요."


그녀가 망설이다 흔들리는 동공을 거뒀다. 또각또각 그녀의 구두 소리가 갈수록 느리게 계단을 오른다. 나에 대한 안타까움과 배려 때문이리라.


나의 부를 만큼 부른 배를 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라오라고 해야 하는 그녀는 어떤 마음일까. 본의 아니게 '민폐 아닌 민폐'를 끼치고 있는 내 임신이 괜히 미안해진다. 서글픈 마음을 제쳐두고 아려오는 발바닥에 짜증이 나기 시작할 즈음, 엘리베이터의 재가동 소식이 들려왔다.


그렇게 투어 리허설을 마쳤다. 지금 시간 00시 20분. 내일 출근까지 6시간 남짓 남았다. 술에 취해 흔들리는 사람들을 물리치고 택시를 잡아타니 가방에서 임산부 배지가 흔들거린다. 괜히 배지를 만지작만지작.


신호 따위는 무시하고 맹렬히 달리는 이 택시가 뱃속 아가는 무시한 채 오버 페이스 중인 내 모습 같아 애꿎은 기사님만 노려보다 잠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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