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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넷 Nov 17. 2019

나의 임신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임신했는데, 연봉 협상해도 될까

'초초초 매직 두줄.. 이거 두줄 맞을까요??'


내가 이런 글을 올리게 될 줄이야. 결혼 5년 차. 작년부터 시작한 임신 준비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하던 즈음이었다. 그러던 중, 칼같이 찾아오던 그분이 오지 않았고 조급한 마음이라는 걸 알면서도 임신테스트기를 꺼내 들었다.


임테기 지옥의 서막, 이 임테기를 시작으로 시판 임테기를 거의 다 해본 듯하다.


눈을 잔뜩 흘기며 불빛에 비춰보면 겨우 두줄이 보이는 정도라 이건 두줄인 듯 두줄 아닌 두줄 같은 상황. 결국 약국에서 종류별로 임신 테스트기를 해보고는 사진을 찍어 임신 커뮤니티에 올리는 꼴이라니. 나도 생각보다 스트레스가 여간 심한 게 아니었나 보다.


이 정도면 임신일 거라는 선배 임산부 판정단들의 격려에 힘입어 연차를 내고 다음날 산부인과로 향했다. 결과는 피검사 기준 임신이나, 임신 확정은 아기집이 확인된 후 가능하니 차주에 다시 올 것.


오랜 과업이 끝을 보인 것 같은 후련함과 함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지금은 2월. 회사가 한 해 먹거리를 수주하기 위해 바쁜 시기임은 물론 연봉협상과 진급발표가 남은 시기였다. 임신 사실을 빨리 알리는 것이 팀 전체를 비롯 특히 팀원 관리를 해야 하는 상사에게 반가운 소식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그건 나한테 득이 되는 선택인가.


고민 끝에 나의 임신을 알리지 않기로 했다. 적어도 연봉 협상과 진급 발표 후에 알리는 것으로 마음먹었다. 누군가는 이기적인 선택이라 손가락질할 수 있겠다만, 챙길 건 챙기고 싶었다. 따져보면 연봉협상과 진급 두 가지 모두 나의 임신과 무관하게 응당한 대가를 받아야 하는 것이렸다. 그렇지만 그리 해맑게 믿기에 난 이제 본 것도 들은 것도 너무 많은 30대 대리다. 내 것을 챙기는데 괜한 리스크를 안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 월급 더 받아도 되는 걸까 


드디어 그날이 왔다. 연.봉 협.상.


일 년에 한 번 찾아오는 연봉협상은 여느 회사처럼 불러주는 대로 사인하는 식이지만 그래도 이곳은 협상 비슷한 형식을 따른다. 그렇기에 왠지 모를 긴장감이 흐른다.


난 특히 이날을 기다려왔다. 스스로 돌이켜 봤을 때 이 회사 근무 4년 중 올해 난 최고로 달렸다. 협상 때 할 말 많은 한 해를 보냈으니 미드에서 봐온 것처럼 당당하게 '협상'할 기회다.


격양된 마음속 한 구석에서 꿈틀거리는 무엇이 있었다. 미안함인 것 같았다. 내가 임신이라면 분명 올 한 해는 예전만큼 근무에 집중하기도 성과를 내기도 어러울 거다. 물론 임신해도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잘 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전해 들은 입덧, 검진, 쏟아지는 졸음 등 가늠이 안 되는 변화는 리스크다. 이런 상황에서 난 내 연봉을 올려달라고 주장해도 되는 걸까. 더 일할 수 있는 다른 이의 연봉 인상분을 가져오는 건 아닐까.


지난한 생각의 소용돌이로 지끈지끈한 머리를 부여잡을 때. 친구에게 메신저가 왔다.

'르넷, 했어?!'


목적어가 없지만 너무나 명확한 의미 전달이었다. 친구에게 복잡한 머릿속을 털어놨다. 이 친구는 나와 내 입사 시절부터 모든 걸 알고 있는 같은 업계에 있는 내 대학 동기다. 가히 내 흑역사와 성공기 모두를 알고 있는 그녀에게 내 임신 사실을 처음으로 고함은 물론 근거 없는 미안한 마음을 털어놓으니 한결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다.


"르넷, 정말 축하해! 근데, 내가 항상 말하지? 르넷은 생각이 너무 많아서 문제라니깐!? "


분명 타박 같은데 왜 이리 속이 시원할까. 할 말은 하지만 상대의 입장도 고려한다. 내가 사이다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다. 허허실실 하며 겸연쩍어하는 나를 보며 그녀가 말을 이어간다.


"르넷은 본인에게 너무 엄격한 것 같으니 이렇게 생각해봐. 내가 임신했는데 올해 일을 작년만큼 못할 것 같아서 회사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럼 나한테 뭐라 할래?"


역시 똑똑한 사람이다. 단번에 내가 개똥 같은 고민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연봉은 과거의 성과를 기반으로 능력을 평가해 받는 것 아니던가. 심지어 진급까지 한 이 시점에 연봉 인상을 미안해하다니. 임신으로 호르몬 이상이 생기기라도 했나 보다. 그렇게 친구와의 현자 타임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니 방으로 들어오라는 인사팀의 메시지가 와있었다.


쇼타임이다. 협상의 시간이 시작됐다. 다행히 제시받은 인상 폭은 만족스러운 수준이었다. 사실 언제나 그렇듯 협상이라기 보다는 의견을 이야기 하는 정도의 자리였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나왔다.


기쁜 마음보다 무거운 마음이 더 큰 연봉 인상이었다. 내 마음의 부채는 어디서 오는 걸까. 개똥 같은 생각이라 믿었건만 쳇바퀴 돌듯 제자리걸음인 이 찝찝함이 출근길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


앞으로 10개월, 나는 계속 이런 미안함과 싸우며 출근하게 되는 걸까. 월급이 들어왔다는 문자 메시지에 선뜻 퇴근길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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