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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넷 Nov 17. 2019

임신하면 인상이 바뀌나 봐. 내가 만만해 보이니

여자의 적은 여자, '우리 때는 회의하다 애 낳으러 갔어'

유달리 그 해 여름, 내 주변에는 임산부가 많았다. 신기하게도 내가 근무한 2층 내에만 출산 예정일이 한 두 달 차이나는 임산부가 3명이 있고 지인 중에도 3명이 같은 해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배가 나온 임산부는 회사에서 길냥이 같은 존재다. 쉽게 연민을 품고 친하지도 않으면서 멋대로 말을 건다. 그러다 호의가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조금 할퀴기라도 하면 이내 적의를 품는 대상.


회사 화장실에 가면 얼굴만 아는 회사 사람들이 말을 걸기 시작했다. '몇 개월이에요?' '예정일이 언제예요'에서 시작해 '아이는 누가 봐주실 거예요'까지. 마치 나와 늘 대화를 나눈 사람처럼 멋대로 선을 넘는 빈도가 잦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얼굴이 낯익은 여자 직원을 여자화장실에서 만났을 때, 난 그들의 거리낌 없는 선 넘기가 꼰대 정신 8: 어설픈 동족 의식 2의 결과물임을 깨달았다.



"애 낳으면 딱 아기 몸무게만큼 빠진다? 나중에 고생할 수도 있다니깐?"


'저 아세요?'라는 말이 목구멍을 간지럽혔지만 이내 칫솔로 입을 틀어막는다. 양치질을 하는 내내 그녀는 뭐라고 혼잣말 뉘앙스로 나에게 말을 걸었고 나는 황급히 입을 헹구고는 웃으며 자리를 떴다.


떨떠름한 마음을 다잡기 위해 단체 채팅창에 썰을 풀어냈다. 그러자, 감히 내가 범접할 수 없었던 레전드 썰들이 터져 나왔고 길냥이 같은 내 신세가 더 측은해졌다. 어디 가서 말 걸기 쉬운 인상이라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는데, 임신하면 호르몬으로 만만한 인상으로 변하는 걸로 정리하기로.





#여자의 적은 여자, '우리 때는 회의하다 애 낳으러 갔어'


내 대학 동기는 나보다 출산 예정일이 한 달 늦었다. 근황을 묻는 카톡 메시지를 통해 들리는 말로는 입덧이 심해 임신 후기인 지금까지 고생 중인 것 같았다. 실제로 친구는 같은 임산부인 내가 보기에도 많이 야위어 안쓰러웠다.


그러던 중, 더 짠한 이야기를 듣게 됐다. 친구는 화장실에 간 어느 날 담당 임원을 만났다. 신생 회사의 여성 임원 중 한 명인 그녀는 힘들어하는 그 친구를 보며 말을 건넸다고 한다.


"우리 때는 미팅하다 애 낳으러 가고 그랬어. 첫째는 예정일보다 보통 늦게 나오니까, 가능한 휴가는 늦게 들어가는 게 00 씨에게도 득일 걸?!"


당신 맘 내 맘.


상냥히 미소 지으며 말하는 임원이 정말 친구를 위하는 마음에 한 마디 건네었는지 조금은 발전한 복지를 누리는 우리 세대가 아니 꼬아 쏘아붙인 건지. 나도 친구도 알지 못한다. 사실 어떤 의도인들 그게 중요한가. 동성에게 부스터를 달고 가열차지는 꼰대 마인드의 발견이 답답할 뿐이지.


'옛날엔 밭 매다 애 낳으러 가고 그랬어'라는 말이 이제는 고리짝 농담처럼 들리듯 언젠가 여성 상사들의 저런 실언도 그렇게 들릴 날이 있겠지.


자신도 그렇게 했으니 상대도 그렇게 하라는 건 폭력이다. 자신도 해냈으니 너희도 해내라는 격려 또한 영혼 없는 응원임과 동시에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불쌍한 처사일 테니.


10년 후 나의 후배들에게 여적여가 되지 않기 위해서 나는 무얼 해야 할까. 고민이 많아지는 티타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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