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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넷 Nov 17. 2019

꼰대인 듯 꼰대 아닌 꼰대 같은 나.

그녀가 슬리퍼를 신고 미팅을 갔다고 해도, 괜찮아 프로야.

과장이 된 뒤 나와 동료는 웃픈 버릇이 생겼다. 바로 ‘꼰대력 검열’이다. 자신이 후배에게 혹은 외주사에 한 행동 중에 꼰대적인 행동이 있었던 건 아닌지 끊임없이 자기 검열하는 것이다. 이런 검열이 결국 자기 혼자만의 판단을 믿지 못해 서로에게 의견을 구하는 웃픈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출처 : 영화 '열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꼰대는 권위적인 사고를 하는 윗사람을 비하하는 말이다. 여기서 ‘권위’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남의 생각은 듣지 않고 본인의 주장만 옳다고 일방적으로 몰아세우거나 ‘나이’를 내세워 본인의 경험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제시하는 행위를 말한다. 상습 표현으로는 어미에 “우리 때는 말이야…” 혹은 대화 말미에 “까라면 까는 거지”라는 관용어구를 사용한다.

 

이토록 내 안의 꼰대를 경계하는 이유는 내가 되기 싫었던 선배의 모습들이 꼰대의 행동들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아니, 선배까지 갈 것도 없이 내가 되기 싫은 어른의 모습들이 꼰대의 모습과 너무 닮아있다고 하는 게 맞겠다.


안타까운 건 이런 검열이 나의 예민이 아니라는 거다. 내가 싫어하는 몇몇 꼰대 기질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실제로 발현되어 버리면서 스스로 당혹스럽기도 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고 세대 간 갈등은 인류 도래 이후 해소된 적이 없다만 변하는 내 모습을 직면하는 건 그다지 유쾌한 순간은 아니다. 그렇기에 오늘도 동료와 며칠 전 있었던 해프닝들을 말하고 무엇이 이렇게 우리를 삐뚤어지게 하고 있는지 고민한다.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건 나도 그 편견의 가해자라는 것.


새벽 4시 30분, 전날 미리 챙겨놓은 짐을 싸들고 인천공항을 향했다.


이날은 내 첫 해외 출장이었다. 촬영 팔럽 차 떠나는 일본 출장. 그러고 보면 꽤나 세상이 바뀌었다. 일간지 기자들이 아닌 페이스북 채널을 데리고 일본 출장을 가다니.


이번 출장은 첫 출장, 처음 보는 매체, 혼자 가는 출장, 해외 출장이라는 점에서 떨림 반 걱정 반이다. 하지만, 덕분에 내가 나도 모르게 가지고 있는 편견이 무엇인지 들여다볼 계기가 되었다.


‘20대 어린 여자 3명, 프로 맞나?’


탑승구 게이트에서 매체 담당자 3명과 인사를 나눴다. 이미 비행기 표 구입 당시, 여권 사본을 본 터라 나이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풍기는 이미지는 사회 초년생의 기분을 풍기고 있었다. 무엇보다 나보다 어린 여성들만 있던 게 걸렸다.


난 얼마 전 머리를 했다. 단발로 자르고 파마를 했다. 스타일 변신도 이유였지만 함께 일하는 고객사 30대 후반 여성들의 왠지 모를 업신여김에 대응하고자 하는 나의 숨은 노력이기도 했다. 참, 나이를 들어 보이게 하기 위해 머리를 하다니..


'이 빌어먹을 편견으로 똘똘 뭉친 세상...'이라고 했건만 나도 다를 바가 1도 없었다.


서먹한 분위기로 탑승구를 통과했다. 각자 티켓팅을 한 덕분에 매체는 매체끼리 나는 나 혼자 착석했다. 아침 일찍부터 움직인 탓일까 잠이 쏟아졌고 조금은 개운한 컨디션으로 일어나 나리타 공항에 도착했다. 분주히 움직여 페이스북 채널 담당자들에게 다가가 말을 붙였다.


어찌 됐든 수 천만 원 콘텐츠를 만들고 태울 매체이고 담당자들이니 잘 보여야 한다. 어찌 됐든 매체 아닌가. 청바지는 넥타이보다 강하고 SNS는 종이 신문보다 강한 시대다. 르넷, 정신 차리자.


매체와 브랜드 이야기를 시작으로 시시콜콜한 이야기부터 적당히 이야기의 공백을 매워가며 예약한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 체크인 시간 전에 도착한 죄로 짐을 일단 호텔에 맡겨두기 위해 채비를 했다. 그때 들려온 혼잣말 한마디가 내 귀를 후벼 팠다.


‘슬리퍼 신고 갈까?’


“아니요, 고객사가 있을 거라서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나도 모르게 한 치의 쉼 없이 그녀의 혼잣말에 답변했다. 그녀는 조금 민망했는지, 자신이 잠깐 정신을 놓은 것 같다며 마른 사과의 말을 건넸다. 이래서, ‘애들은 안 되는 건가?’ 속으로 삭이며 겨우 늦지 않게 매장에 도착했다.


곧 첫 번째 편견이 깨졌다. 촬영을 준비하며 그녀들은 꽤나 프로페셔널했다. 똑같은 제품을 두고 어떻게 촬영해야 어떤 방향으로 카메라가 움직여야 더 맛있게 보이는지 단번에 알았다. 참, 내가 비전문가적인 영역이라 예단했었구나 하며 머리를 긁적이게 되는 순간이었다.

 

누구나 찍는 음식, 어떻게 찍느냐가 그렇게 다를까 했다. 그런데, 그렇게 다르더라. 그리고 더 멋있더라.

누구나 찍는 음식, 누구도 그렇게는 찍지 못할 것 같았다. 역시, 프로는 결과물로 인정받는다. 문득, 그 말이 떠올랐다.


‘세상에 대단한 일은 없다. 그 일을 대단하게 하는 사람만 존재할 뿐.’


촬영을 마치고 부랴부랴 뒤풀이 장소로 이동했다. 뒤풀이는 고객사를 소개해준 일본의 자매 PR 에이전시의 요청으로 만들어진 자리였다. 가볍게 술 한 잔 하는 자리라고 했지만, 나는 믿지 않았다.


촬영 장소에서 일본 대행사 담당자의 갑작스러운 제안으로 만들어진 자리였기에, 나는 상사에게 이 상황을 메신저로 보고했다. 아직 과장 나부랭이인 내가 오픈하면 안 되는 이야기를 파트너사에게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일이 있을까, 몇 가지 체크하기 위해서였다.


담당자가 공유한 장소에 도착하니 한눈에 봐도 캐주얼한 느낌이었다. 전형적인 이자카야. 그래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약 2시간 동안 진행된 저녁 식사는 정말 지난 프로젝트에 대한 소회와 앞으로 진행될 프로젝트에 대한 기대감 등 실무자들끼리의 시시콜콜한 이야기였다. 격의 없는 그들의 태도에 맥이 풀릴 정도였다.


‘난 무슨 걱정을 그렇게나 하고 온 거지.’


돌아오는 택시에서 이번에도 무참히 깨진 내 두 번째 편견을 마주했다. 그저 일본 파트너사였고 업무를 진행할 때 좋게 말하면 매우 정중한 나쁘게 말하면 속을 모르겠는 그들의 태도에  속을 끓인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때마다 이해할 만한 상황이 있었음에도 난 ‘일본 고객사들은 속내를 보여주지 않아. 그들의 행동에 속셈 없는 행동은 없다.’라고 일반화시켜 버렸던 가 보다.



편견을 욕하며 단발로 자른 머리가 어깨를 간지럽히는 것이 꽤나 신경 쓰이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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