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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넷 Nov 30. 2020

오피스 헤어롤 갑론을박

동료에 대한 심리적 거리두기란 가능한가.

연휴를 앞둔 금요일이었다. 여느때처럼 점심을 먹고 칼퇴 전의를 다지며 자리에 앉은 나는 새어나오는 '헐'을 입틀막했다.


얼굴은 아는데 이름과 연차 직급은 모르는 회사 직원이 핑크빛 헤어롤로 앞머리를 단단히 고정시키고는 업무에 무척이나 집중해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 맞다. 우리집에도 있고 너네집에도 있고 너네 옆집에도 있을 그 핑크 헤어롤. 대한민국 여성들의 헤어볼륨을 책임지고 있는 저 헤어롤을 사무실에서 실착한 모습을 마주하게 될거라고는 나같은 범인은 상상도 하지 못했건만.


사실 저 핑크 헤어롤을 머리띠마냥 스스럼없이 착용한 제 3자들은 꽤나 많이 봐왔다. 아니 근래들어 많이 보여졌다고 한 것이 정확하겠다. 지하철, 동네 슈퍼, 버스, 길거리 등 스스럼없이 헤어롤을 말고 있는 이들이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건만. 사무실에서 마주하니 왜 이런 불편한 감정이 생겨나는지 복잡미묘했다. 화장실 가기 귀찮아 자리에서 화장을 고치는 내가 할 말은 아니라는 걸 알지만 보기 좀 불편하달까.

 


# 오피스 헤어롤 갑론을박 - 일만 잘하면 된다는 결론.


우선 나와 신입시절을 함께 보낸 동기들의 카톡창에 물음을 던졌다. 왠지 나의 이 불편한 심기를 공감해줄 것 같아서 였나보다.

 


"사무실에서 헤어롤 마는 거 어떻게 생각해?"

평안했던 금요일 오후, 내가 쏘아올린 물음은 각자가 오피스 라이프에서 느꼈던 불편한 감정의 폭로를 촉발시켰다. 서로 네가 꼰대니, 니가 개념이 없니 의미없는 실랑이를 하던 중 두 번째 물음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근데, 사무실에서 김밥 먹는거 어떻게 생각해?"



'응? 내가 어제도 그저께에도 자리에서 먹은 그 김밥?' 나도 모르게 심호흡을 하며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채팅창을 지켜봤다.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50:50으로 갈리는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각자의 의아함에 대해 채팅창 내 여론은 대부분 다 50:50으로 갈렸다.


속시원히 같이 욕하려고 올린 질문일텐데, 결국 내가 얻은 건 '사람 바이 사람' 이라는 결론. 사무실에서 용납할 수 있는 행위인가에 대한 질문 이후에는 그 뒤 반드시 행위의 주체에 대한 곱지않은 코멘트가 따라왔다. '일은 더럽게 안하면서...' '맨날 지각하면서...' 처럼 말이다.


그러던 중, 한 친구가 말했다.


" 그냥 일만 잘하면 되는거 아니야?"

맞다. 그 친구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 회사에서는 일만 잘하면 된다. 근데 나는 왜 저 이름도 직급도 모르는 사람을 내멋대로 판단하려고 했던 걸까.


그 언젠가 슬리퍼를 신고 고객사 동석 촬영현장에 가겠다는 외주사에 학을 떼고 말렸던 내 모습이 생각났다. 그때도 반성했건만, 자라나는 꼰대력을 어찌할 방도가 없나보다. 다른 이의 외관 혹은 모습이 그 사람의 능력을 평가하는 잣대가 될 수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 건만. 나는 3년 전보다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한 상태였다.




#오피스 가이드라인의 핵심, 심리적 거리두기  


1년 가까이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며 사무실 책상에 투명 플라스틱 막이 생겼다. 정확히는 투명 가림막인 셈이다. 마스크를 쓰고 회사생활을 하지만 혹시 모를 재채기나 기타 상황으로 발생할 비말감염을  최소화 하겠다는 경영진의 빅픽처였다. 업의 특성 상 무기한 재택을 할 수 없는 상황인만큼 회사측의 이러한 결심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경영지원팀의 주도로 팀별 투명 플라스틱 막이 나눠졌고 마주보고 있는 동료와 함께 책상을 정리하며 설치를 마무리했다.


 


손을 탁탁 털고 자리에 다시 앉자 필름을 덜 벗겨서 인지 앞자리의 동료가 뿌옇게 보였다. 잠시 필름을 걷어낼까 싶다가 귀찮은 마음에 이내 노트북을 열고 시선을 거두었다. 아차차, 나는 항상 이런 식이 아니었을까. 동료의 혹은 사람들의 본질을 보기 귀찮아 고정관념의 필름지를 뜯지 않은채로 뿌옇게 보이는 모습이 그들의 모습이라고 여겨온 듯했다. 문제는 어느새 불투명한 동료의 모습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익숙해져버린다는 거다.


괜한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진 난 부시럭 거리며 내 쪽 필름지를 뜯어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조금 더 선명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동료의 모습은 뿌옇게 보였다. 동료쪽 필름지가 그대로 남아있어서 인 것 같았지만 사실은 투명막 자체의 문제였다. 사실 '막'이 생겼는데 선명하게 상대방이 보이기를 바라는 게 더 바보같은 기대가 아니었나 싶다. 평소 주변에 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내가 왜 유독 이 투명막에 집착하는지 의아해졌다. 명막을 괜스레 노려보다 내가 내 안의 투명막을 자각해서 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스스로 사람들에 관심이 없고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기준으로 포용적인 사람이라 치부했건만, 나는 사실 그렇지 않았다. 동료들의 단편적인 모습 혹은 결과를 보고 쉽사리 단정지어 버리곤 했다. 불투명막을 동료와 내 앞에 세워놓고 있었던 꼴이다.  

 

'아, 저 사람은 말도 논리정연하게 하네. 일도 분명하게 잘하겠지?'


'지각을 밥먹듯이 하네. 일이 잘 진행되면 그게 더 이상하겠다.'


내 알바 아니라고 단정지었지만, 어느새 마음속으로는 동료에 대한 평가와 예상을 규정하고 있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아니, 사람을 잘 안다는 것이 애초에 가능한 걸까 싶다. 스스로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해 손쉽게 규정해주는 MBTI 식의 레이블 게임을 즐겨 하면서 다른 이들은 내멋대로 규정하고 있었다니. 아이러니의 향연이다. 


동료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함께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드라마에서만 가능한 일인가 하는 씁쓸한 결론에 이르다보니 앞에 앉은 동료를 마주하기 어려웠다. 조용히 노트북을 들고 자리를 옮겨 마음의 불편함을 회피해본다. 정 오피스에서 필요한 건 사회적 거리두기보다 심리적 거리두기 같다. 비말 및 물리접 접촉을 통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이 호흡기관의 경직을 유발해 생존에 필수적인 호흡을 힘겹게 만드는 것 처럼 편견이라는 바이러스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의 필수인 관계의 확장과 형성을 편견이라는 바이러스가 경직되게 만들어 본인의 인간관계를 경직되게 만드는 셈이다. 


비말접촉을 통한 바이러스 감염을  막기 위해 마스크를 쓰고 사회적 거리두기는 하는 것 처럼 동료를 멋대로 평가하는 이 태도를 막기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다면 좋을텐데. 사람의 본성일지 혹은 편견덩어리인 오래된 내 습관이 자라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지 고민이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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