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마지막 출산 후에는 산후조리를 특히 잘하라고 하기에 둘째 출산을 앞두고 몇 달 전부터 새로 생긴 조리원을 예약해 둔 터였다.
둘째를 낳고 조리원에 가는 날, 날벼락같은 소식이 찾아들었다. 예약했던 병원 직속 조리원에 전염병이 돌아 1주일간 폐쇄가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병원 측에서 다른 조리원을 알아봐 주겠다고 했지만 쉽지 않아 보였다. 인원도 많을뿐더러, 전염병 잠복기 문제도 고려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예정보다 이틀을 병원에서 더 머물고서야 남편이 알아본 조리원으로 옮길 수 있었다.
조리원 천국에서의 2주가 무탈하게 흘러갔고, 다음날이면 첫째 아이가 기다리는 집으로 퇴원할 예정이었다. 또다시 날벼락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첫째가 독감에 걸렸다는 것이다.
태어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아이를 독감바이러스가 있는 곳으로 데려갈 수는 없었다. 그때 당시 시부모님도 우리 집에 함께 계셨기에, 선택지는 친정집뿐이었다.
그곳에는 내가 결혼하기 전부터 함께 살아온, 열여섯 살이 된 반려견이 있었다. 유방암으로 몸에서 진물이 나오고 더 이상 털도 매끄럽지 못한 노견이었다. 이런 이유로 산후조리를 친정집에서 하게 될 것이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아이를 따뜻하고 보드라운 포에 감싸, 고이 안고 친정집에 도착했다. 무릎 수술을 하셔서 쉬고 계시던 아빠가 반갑게 우리를 맞아주셨다. 잠시 뒤, 친정으로 부른 산후관리사분이 오셔서 분주하게 미역국을 끓이셨다.
나는 강아지를 피해 아이를 안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꼭 닫았다. 젖을 먹고 새근새근 잠든 아이를 두고 잠시 거실로 나왔을 때였다.
아빠가 소파 아래에 누워 계셨다.
"아빠, 왜 여기서 이렇게 자고 있어요? 불편하게. 올라가서 바로 누워 자."
아빠를 흔들어 깨우는데 움직임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누워 계신 아빠의 허리와 다리가 괴이하게 틀어져 있었다. 갑자기 등줄기로부터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아빠, 아빠!"
여전히 미동도 없으셨다. 눈을 꼭 감은 채로.
119 버튼을 눌렀다.
"아빠가 쓰러지셨고, 의식이 없어요!"
다급한 목소리로 신고를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이 상태로 얼마나 누워계셨던 걸까.'
걱정도 잠시, 아빠의 숨이 멎을 듯, 거칠고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모로 누워 있던 아빠의 상체를 바르게 돌려 눕히는 순간, 손 끝에서 평소와 다른 딱딱함이 느껴졌다. 곧이어 아빠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청색빛 마저 비치고 있었다. 구급대원이 도착하기까지의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10분? 5분? 아니, 단 1분도 지체할 수 없이 위험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다시 119에 전화를 걸었다.
"방금 아빠가 쓰러지셨다고 신고한 사람인데요. 지금 아빠 호흡이 너무 안 좋아요. 당장 뭐라도 해야 될 것 같아요!"
나의 다급한 목소리에 이어, 차분하고 간결한 어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폐소생술을 해야 합니다. 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아니요. tv로 보긴 했지만, 해 본 적은 없어요."
"지금 바로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젖꼭지 사이 중간이 명치입니다. 명치에 손을 깍지 끼고 올린 다음, 상체의 무게를 실어서 제가 구호를 붙일 테니 거기에 맞춰서 하셔야 됩니다."
거실에서 일어난 소란에 주방에 계시던 산후관리사분도 뛰쳐나왔다.
"애기 엄마, 손목 아껴야 된다. 내가 할게."
이 와중에도 직업의식을 발휘하는 그녀가 고마웠지만, 아빠의 목숨을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었다.
휴대전화기를 스피커폰으로 전환하고, 소파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위기 탈출 넘버원'에서 눈여겨보았던 심폐소생술 장면이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해야만 했다.
"일, 이, 삼, 사, 삼십. 전문가가 아닌 사람은 인공호흡은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자, 다시 일, 이, 삼, 사..."
두 세트쯤 지나고 세 번째 세트를 이어 갈 때쯤이었다.
아빠는 거칠고 깊은 숨을 한꺼번에 토해 내셨다. 그러자 이내 아빠 얼굴에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굳어 있던 몸도 '탁' 하고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 순간이었다.
"딩동"
"구급대원입니다"
주황색 옷을 입고, 들 것을 든 분들이 우리 집으로 빠르게 들어왔다.
나는 그제야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간단히 상황을 물었고, 나는 눈물로 자꾸만 뭉개지는 목소리로 겨우 상황을 말했다.
그사이 쓰러져 있던 아빠는 더듬거리며, 횡설수설 말을 뱉으셨다.
"울지 마세요. 아버지 괜찮으시네요. 신고자시죠? 같이 구급차 타고 병원으로 가주셔야 됩니다."
하지만 방에는 갓 태어난 지 3주 된 아이가 자고 있었다. 산후관리사분께 아이에 대한 인수인계는 하나도 되지 않은 상황, 도저히 구급차를 탈 수 없었다.
"제가 지금 갓난아이가 있어서 갈 수가 없어요."
구급대원은 알겠다고 짧게 답하고, 서둘러 집을 빠져나갔다.
황망한 마음을 추스려 엄마와 남편에게 사실을 알렸고, 나를 대신해 서둘러 병원으로 가기로 했다.
아빠는 병원으로 향하는 구급차에서도 두 번의 심정지가 더 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다시 의식이 없으신 채로 중환자실로 입원하셨다. 거실에 쓰러진 아빠를 처음 발견한 것은 나였지만, 아빠가 얼마동안 쓰러져 계셨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의사는 모든 것에 확답해 줄 수 없다고 했다.
깨어나실지도, 깨어나시더라도 장애 없이 멀쩡하실지 여부도.
정신없는 하루가 지나고, 짙은 어둠이 고요한 집으로 내려앉았다. 아이를 재우고 그 곁에 누웠다. 3주 된 갓난아이, 산모 그리고 노견, 이렇게 셋만 함께 있는 집이라니. 우습고도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불안으로 잠들기 어려운 밤이었다. 엄마는 그 날밤 집으로 오지 못하셨다. 그다음 날도.
'아빠가 못 깨어나시면 어쩌지? 엄마의 걱정처럼 깨어나셨지만 혹시나 뇌의 영구 장애가 생겨, 아이로 깨어나시면 어쩌지. 누워 계시는 채로 깨어나시면 또 어쩌지'하는 오만가지 현실적인 걱정이 다 들었다.
"진아, 장인어른 깨어나셨어."
사일이 꼬박 지난날, 전화를 통해 들은 남편의 한 마디에 봇물 터지듯 울음이 터졌다. 꺼이꺼이 울음이 났다. 그간의 걱정마저, 아빠께 죄송해지는 순간이었다. 깨어나셨다는 한마디로 충분했다. 그저 살아 계셔주셔서 감사했다.
중환자실에 입원 직후, 뇌의 손상을 최소화하기 위해 저온치료를 병원 측에서 권했다고 한다. 현실적인 고민으로 엄마는 망설이셨다고 했다. 남편은 설령 효과가 없다 하더라도 하는 데까지 해봐야지 않겠냐며, 비용은 본인이 낸다며 치료를 진행시켰다고 한다. 아빠가 병원에 계시는 몇 주 동안 남편은 단,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아빠와 엄마가 계시는 병원을 들렀다.
"진아, 여기 입원해 있는 다른 사람들이 이서방보고 아들이냐고 묻더라. 매일 아침저녁으로 오니까. 사위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놀라데. 이런 사위가 어딨냐고."라고 말하시며 엄마는 기분 좋게 웃으시며 전화를 끊으셨다. 정작 딸인 나는 아빠가 병원에 계시는 동안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내가 갈게. 내가 매일 장인어른 괜찮으신지 보고 올게. 장모님도 챙기고."
오빠의 식구들은 서울에 살고 있었고, 나는 병원의 갈 상황이 아니었다. 아빠의 소식에 급히 대구로 내려왔던 오빠와 새언니에게, 나중에 이런 말을 전해 들었다.
"아가씨, 진짜 매제가 저 멀리서 오는데, 진짜 후광이 비치드라니까요."
종합병원 안을 누비며 필요한 치료를 빠르게 결정하고, 복잡한 병원 절차를 척척 해결하는 모습에서, 뒤에 후광이 보였다고.
아버지는 요즘도 종종 말하신다.
"내가 솔이 덕분에 살았지. 이서방 덕분에 살았고."
아빠, 심폐소생술은 제가 했는데요?
만약 첫째 아이가 독감에 걸리지 않았다면, 아니 조리원 입실이 전염병으로 인해 미루어지지 않았다면, 아니 둘째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빠는 분명 그 시간, 친정집에 혼자 계셨을 거다. 그 뒤의 일은, 상상하기도 싫은 일들이 벌어졌으리라.
기막힌 우연이 겹쳐서 덤으로 남은 생을 받으신 아버지는, 감사하게도 둘째가 11살이 된 지금도 건강하게 우리 곁에 살아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