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준 Dec 11. 2023

5. 층간소음이 유발하는 신체화 반응

현재 진행형인 나의 소음 지옥.

불안과 두려움으로 점철된 일상 속에서 심장이 발치에 떨어질 때마다 '이것도 소재로 쓸 수 있겠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나마 살만 하지 않을까 싶어,


살려고 시작하는 소음 일지.




<2023년 11월 26일, 일요일>

밤을 꼴딱 새웠다.


거의 한 달 반을 소음으로 인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 신체적인 스트레스 반응이 만성화되어 가는 것 같다.


스트레스를 느끼면 교감 신경이 활성화된다. 이때 우리 신체는 도망가거나 싸울 수 있는 몸을 만들기 위해, 즉 투쟁-도피 반응을 이끌어 내기 위해 여러 신체 반응을 유도한다.


우선 심박수를 높여 몸으로 더 많은 혈액을 보낸다. 그래야 다리 근육이 힘을 얻어 더 잘 도망갈 수 있고 팔이 힘을 얻어 더 잘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도망을 가든 싸우든, 에너지를 여기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소화 등 현재로서는 불필요한 기능에 투입될 에너지도 근육으로 보낸다. 그래서 소화가 잘 안 된다.


이렇듯 스트레스 반응이 일어나면 심박수가 올라가 가슴이 벌렁벌렁 거리고, 소화가 잘 안 되고, 두통이 생기는 등 여러 신체적 반응이 나타난다. 이는 포식자를 만나면 최대한 빨리 도망가야 했던 수렵채집 시절에는 필요했던 기능이었겠으나, 현대인들은 불편한 통화를 해야 하거나 길 가다 어깨를 부딪힌 사람과 신경전을 벌이는 등 치명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이러한 스트레스 반응을 겪는다.


* * *


요즘의 나는 스트레스의 신체화 증상으로 인해 온몸이 아프고 삐그덕거리고 무기력하다.


- 가슴 두근거림/과민: 이제는 '쿵!' 하는 소리 한 번에 파블로브의 개처럼 조건반사적으로 심장이 벌렁벌렁 뛰기 시작한다. '또 시작되는 건가.'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또 무슨 소리라도 날까 봐 두려움에 떨면서 온 신경을 청각에 집중한다. 조용할 때는 또 소리가 날까 봐 긴장 상태를 풀지 못하고, 소음이 들리면 스트레스와 분노로 인해 진정하지 못한다. 출처가 윗집이 아니더라도, 어딘가에서 들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에 과도하게 예민해졌다.


그래서 나는 요즘 집을 고요한 상태로 두지 못한다. 음악이나 영상을 틀어 놓고 어떤 소리라도 나게 만들어야 한다. 고요한 상태에서 갑자기 '쿵!' 하는 소리가 들리면 몸이 다시 반응할 걸 알기 때문에. 이미 몸은 긴장 상태이긴 하지만, 그래도 최대한 안 들어 보려는 발악이다.


- 통증: 스트레스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목 왼쪽, 경동맥 지나가는 근처인 것 같은데, 그 부근이 아프다.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느낌이라기보다는 욱신욱신한 자극이다. 그리고 귀가 아프다. 물리적으로 아프다기보다는 심인성 증상인 것 같다. 고막이 괜히 아픈 느낌. 게다가 아무 소리가 안 나도 꼭 어디선가 둥둥하는 소리가 들리는 느낌이 든다.


- 불면증: 긴장 상태에서 해방되지 못한 채 한 달 반을 살다 보니 정말 정신병이 생길 것만 같다. 그리고 밤에 잠을 못 잔다. 하루 종일 그러고 있던 탓에 밤이 되어도 심장이 진정을 않는다. 싱잉볼 소리도 듣고, 스트레스밤으로 아로마 마사지를 하며 명상도 하는데, 전부 소용이 없다. '쿵!' 한 번이면 말짱 도루묵이다. 차라리 귀를 찔러 아무 소리도 못 들으면 좋겠다.


잠을 못 자니 피곤은 하고, 그런데 잠을 자지는 못하겠고. 낮에는 소음 때문에 낮잠을 잘 수도 없고. 심장이 벌렁거려 카페인을 더 마시지도 못하겠고. 예민할 대로 예민하지만, 죄 없는 남편에게 화풀이는 하기 싫어 어떻게든 감정을 누르고는 있는데. 그러려니 너무 힘들고, 속상하고, 슬프고, 우울하다.


그외에도 소화불량, 손발 떨림, 어지러움, 무기력함, 집중력 저하 등의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


* * *


그래서 요 며칠은 그냥 툭 치면 눈물이 흐른다.


어제 엘리베이터 앞에서 들린 소리에 의하면 오늘도 짐 옮기러 올 것 같던데. 이사도 안 온 집이니 매트 같은 건 당연히 깔았을 리 없고. 어제 '소음이 좀 힘들다'라고 전달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슬리퍼를 사 올 것 같지도 않다.


점심시간이 지날 때까지는 조용하길래 '휴, 다행이다.' 하면서 얼른 일을 했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4시가 지나자 다시 천둥 치는 듯한 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오늘 외부 일정으로 남편이 집에 없는 게 다행이었다.


저녁 9시, TV를 보며 남편과 나는 계속되는 이 발망치 소리가 들리지 않는 척하며 꾸역꾸역 저녁을 먹었다. 둘이 서로 이 주제로 대화를 하지 않으려 어쩔 수 없이 귀로 들어오는 이 청각적 자극을 애써 무시하려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게다가 난 이미 몇 시간 동안 참아대느라 명치가 아팠다. 역시나 밥을 몇 숟갈 뜨니 바로 신호가 왔다. '한 수저만 더 먹으면 너는 바로 체한다.'


10시쯤 되니 가더라. 나도 남의 사생활 따윈 알고 싶지 않다.


일을 끝내고 난 늦은 시각, 잠자리에 누우며 생각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지?


매거진의 이전글 4. 집순이에게서 집을 빼앗으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