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어도 진행형인 소음 지옥.
마음을 다지며 버텨 보려 애쓰고 있지만, 그럼에도 벅찰 때를 위한
계속해서 살아 나가기 위해 쓰는 소음 일지.
<2024년 1월 6일, 토요일>
집에 있으면 불안해하는 나를 위해 남편은 요즘 주말이면 근처의 한적한 카페를 찾아 데리고 나를 데리고 나간다. 고맙고 미안하다. 원래는 일이 바빠서 주말에도 출근해야 한다고 했었는데.
저녁에는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무척 아름다웠다. 요즘은 아름다운 것을 보면 눈물이 난다. 왜 그럴까?
눈을 맞으며 남편과 함께 동네를 둘러보며 외식할 곳을 찾는 와중에도 나는 이 식사가 끝난 뒤 집에 들어갈 것이 걱정되고 또 불안했다. 어쩌다가 나에게 집은 그런 장소가 되어 버린 걸까.
트라우마가 생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심각한 사건을 겪은 분들이 경험하는 것과 같은 트라우마에 견줄 수는 없을 테다. 하지만 수개월에 걸쳐 점진적으로 그리고 발달적으로 겪은 그 모든 일들이 결과적으로는 나에게 '집'이라는 장소에 대한 트라우마를 남겼고, 그렇기에 나는 집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뛰고 숨 쉬는 게 불편해지는 것 같다.
지난 수요일을 기점으로 내 마음의 방어벽은 와르르 무너졌다.
10월 처음 무너졌던 마음의 방어벽은 애써 쌓기가 무섭게 무너지고, 또 무너지고, 또 무너졌다. 아무리 시멘트를 발라 벽돌을 쌓아도 그 시멘트가 굳을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그렇게 점점 낮아지던 벽은 지난 수요일, 완전히 바닥까지 무너져 내렸다.
이제는 인생 자체가 허무하고 무상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남편이 곁에 있을 때는 그래도 조금 즐겁고 살만 하지만, 혼자 남겨지면 지금 나는 왜 존재하고 있나라는 회의감에 휩싸일 뿐이다.
마음도 잃고, 표정도 잃었다. 모든 것에 대한 의욕도 잃었고, 의지도 잃었다.
혹자는 이렇게 묻겠지. 층간 소음으로 삶의 의지를 잃는 게 말이 되냐고. 억지 부리지 말라고. 이해할 수 없다면 그렇게 생각해도 된다. 누군가를 설득하고 자시고 할 의지도 없다. 그저 그렇게 된 피해자가 여기 한 명 있다는 것, 그것만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2024년 1월 7일, 일요일>
태어나 처음으로 성당 미사에 참석했다.
딱히 믿는 종교도 없고 신에게 기댈 생각도 없다. 기대도 하지 않는다. 내가 겪는 문제는 실재하는 것이며, 신은 실재적인 방식으로는 인간을 돕지 않으니까.
그냥... 그 어떤 미움도, 증오도 없는 평화로운 공간에 있고 싶었다. 신성하고 경건한 공기를 들이쉬고 싶었다. 한 마음으로 어떤 대상을 경외하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고 싶었다.
방문한 동네 성당은 내가 기대했던 성스러운 분위기를 내는 곳은 아니었다. 오히려 개신교 교회 같은 느낌이었달까. 그래도 신자들이 목소리를 모아 기도하는 소리에 마음이 조금은 평안해졌다.
나온 김에 점심까지 먹고 집에 들어가기로 했다. 점심을 다 먹고 나니 갑자기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숨 쉬는 게 불편할 정도로 심장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차를 타고 집에 오는 내내 가라앉지 않았다. 집에 오자마자 신경과 약과 우울증 약을 먹었다. TV를 보며 잠시 기다렸지만 가라앉지 않았다. 정신과에서 필요시 먹으라고 준 약을 먹었다. 조금 지나니 겨우 살짝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대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걸까.
너무 혼란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