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라색 인간입니다
Chapter 2. 파란 맛 - 두 번째 이야기 "스펙"
Chapter 2 파란 맛(이성적인 나)
2. 스펙_피, 땀, 눈물
초등 6년, 중등 3년, 고등 3년의 기나긴 레이스를 달려 마침내 만나게 된 수학 능력 시험. 결국 그동안의 노력들이 하루의 시험에서 결정이 나고, 종이 한 장에 숫자로 매겨진 성적표를 손에 들게 된다. 어릴 적에는 꽤나 똑똑하다는 소리도 듣고, 좋은 성적을 줄곧 받고, 교과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이런저런 상으로 칭찬만 받고 살다가 고등학교의 깊어지는 난이도 있는 문제들에 하나둘씩 점수는 깎이고, 그저 그런 중상위권의 성적을 받은 평범한 수험생이 되어 버렸다. 꿈도 적성도 알아볼 기회 한번 경험하지 못한 채, 나의 성적으로 갈 수 있는 학교들은 어디이고, 내가 갈 수 있는 과는 어디인지 전국 대학 성적분포도를 펼쳐놓고 키 재기하듯 나의 초라한 성적을 학교들과 전공에 끼워 맞춰본다. 그나마 미래에 대한 안정된 직장을 꿈꾸며 적어낸 지방대 사범대는 보기 좋게 떨어지고, 혹시나 해서 써놓았던 마지막 학교만 떡하니 붙어서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나의 서울 유학 생활이 시작되었다.
대학생활에 대한 로망을 품고 시작한 설렘 가득한 캠퍼스 생활은 한 달도 채 못 간 채 다시 나를 도서관에 눌러 앉혔다. 학점에 자격증에 각종 공모전에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스케줄들이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공강'이라는 고등학생 때까지 꿈꾸지도 못할 자유로운 시스템이 주워졌음에도 마음껏 누리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자유에 대한 책임이 너무나도 무거웠기에 한 시간도 허투루 쓸 수가 없었다. 방학이 되면 그 압박감은 더했다. 이 귀한 자유의 시간에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라는 불안감에. 누군가는 자격증에 올인하고, 또 누군가는 토익점수 올리기에 열을 냈고, 여유 있는 다른 누군가는 해외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정확한 목표도 없이 나름 열심히만 살았던 나에게는 더욱 혼란스러운 시간이었다. 자격증 공부도 시작해보고 토익학원도 수강해보고 사회경험도 쌓아야 한다며 철판볶음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도 시작했다.
그렇게 대학에서 3년을 자유롭지도 독하지도 않은 그 언저리쯤 시간을 보내고 나니 산처럼 쌓여 있어야 했던 나의 스펙은 바닥에 가까웠고, 1년 후 졸업이라는 말에 덜컥 겁이 나 도망치듯 휴학을 하고는 나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취업카페에서 얘기해대는 대기업 입사조건이라는 것이 내가 3년을 다시 산다 해도 다 못 쌓을 것 만 같은 '넘사벽'이었다. 겨우 토익점수만 조금 올린 채 나의 휴학 생활은 끝이 났고, 일단 졸업은 하자라는 심경으로 학교에 복학한 채 끝없는 서류 접수가 시작되었다. 멋있고 따뜻하게만 보였던 대기업들에게서는 차디찬 거절의 메일들이 쏟아졌고, 나는 내가 살아온 모든 노력들이 거절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얼굴도 보여주지 못 한 채 부족한 스펙들로 거절에 거절을 당했다. 마냥 시간을 낭비한 채 살아온 인생도 아닌데, 나 자신이 참 많이 부족하구나라는 바닥을 경험하게 되었다.
끝없는 도전 끝에 결국 공기업의 계약직으로 일을 시작했지만, 당분간 정규직을 뽑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퇴사를 결심하고는 고향으로 내려와 다른 길을 택했다.
시간이 흐르고 보니 스펙이란 것이 졸업 후에는 회사들이 원하는 학업성적, 영어성적, 각종 자격증과 공모전 수상 경력들일지 몰라도, 이런저런 직업적인 방황을 끝낸 요즘은 내가 열심히 걸어온 한걸음 한걸음들이 모두 모여 내 인생의 스펙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걸음 중에는 길을 잘못 들어 다시 돌아 나와야 할 때도 있었고, 너무 빨리 뛰어 넘어진 적도 있었고, 너무 늦게 걸어 좋은 기회를 놓친 적도 있었다. 인생의 시기마다 마주하게 되고 겪어내야 되는 노력과 눈물의 과제들이 있다. 그 시기의 내가 최선을 다했다면 후회 없이 털어내고, 또 다른 멋진 과제를 맞이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도전해보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남들이 정해놓은 수많은 스펙들보다도 내가 가치 있다고 여긴 모든 경험들이 나에게는 눈부신 스펙이고 보물들이다. 앞으로도 나는 내 삶을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여러 도전들로 내 스펙을 그리고 내 보물창고를 채워나갈 것이다. 다른 이들이 정해놓은 틀이 아닌, 나만의 틀에 맞추어서.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