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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셀, 단식 앱

루틴으로 갓생 살기 - 루틴 (6) 도구들, 세 번째

by 히말

엑셀


일기에 흔히 적는 내용을 생각해 보자. 날씨, 아침에 일어났을 때 기분, 오늘 뭐 했는지 등등. 무형식이 일기의 형식이지만, 분명히 형식에 맞춰 기록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이 용도에 적합한 것이 엑셀이다. 엑셀을 단지 줄 그어진 빈칸의 집합이라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이 용도로 엑셀을 활용하는 것은 괜찮아 보인다.


새해를 맞으면 우선 엑셀로 두 개의 스프레드시트를 만들어 왔다. 하나는 매일 기록, 또 하나는 가계부다. 요즘에는 독서 기록까지 해서 매년 3개의 스프레드시트를 만든다. 엑셀의 장점은 명확하다. 내 마음 가는 대로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한 기록장이라는 점이다.


매일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투약 기록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토피성 피부염 환자들에게 항히스타민제는 비타민 같은 것이다. 의사들은 내성이 절대 생기지 않는 약이니 보약처럼 챙겨 먹으라 조언한다. 그러나 세상에 내성이 생기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는 주장이야말로 참신하다. 마구 긁어 대미지를 증폭시킬 수는 없어 항히스타민제를 먹기는 먹었지만, 하루에 2개, 3개를 먹는 일도 있어 아무래도 기록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게 엑셀로 매일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계기인 것 같다.


오랫동안 엑셀에 남기던 매일 기록으로는 기상 시간, 취침 시간, 운동 내용, 프로토픽 내지 스테로이드 연고 사용 내역, 항히스타민제 복용 내역 등이 있다. 기억하고 싶은 메모를 남기기도 하고, 영화를 보고 나서 짧은 평을 남기기도 했다. 필요에 따라 항목이 계속 바뀌는 것은 당연하다. 지금 나의 매일 기록은 운동 내역이 핵심이다. 기상 시간과 취침 시간은 삼성 헬스로 기록하는 것이 훨씬 간편해서 그쪽으로 옮겼다.


이렇게 기록해서 무슨 소용이 있냐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대개는 기록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다. 그러나 가끔 간단한 통계 분석을 해보기도 한다. 애초에 항히스타민제 복용 내역을 기록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어느 날 너무 가려워 항히스타민제를 서너 알 먹었다면, 나중에 조금 덜 먹어야겠다는 생각 정도는 하려고 만든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항히스타민제 복용 통계를 차트로 만들어 볼 수도 있게 된다.


여기에서도 균형이 중요하다. 현재 내 독서 기록에는 책 제목, 저자 이름 외에도 독서종료일, 평점, 장르, 짧은 평, 종이책인지 전자책인지, 왜 읽게 되었는지 등등 항목이 많다. 왜 읽게 되었는지는 훑어보고 읽기로 했는지, 유명해서 읽기로 했는지, 누가 추천해 준 것인지를 기록한다. 이런 항목이 있으면 그걸 기준으로 피벗 테이블을 만들어 볼 수 있다. 예컨대 유명해서 읽은 경우 별로 좋지 않은 책을 만날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다든가 하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고, 그렇다면 유명세에 기대어 읽을 책을 고르는 일은 좀 자제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데이터를 얻기 위해 책을 읽을 때마다 항목 하나를 더 기록하는 일은 쉽지 않다. 아마 내년 스프레드시트에는 이 항목을 없애지 않을까.


엑셀 기록은 필요에 따라 항목을 조정하는 것이 핵심이다. 더 간편한 기록 수단이 등장한다면, 그쪽으로 관할권을 넘기는 것이 루틴 지속성에 도움이 된다. 그래서 가끔 검색해 본다. 이런 건 기록하는 사람이 많을 테니 앱이 나와 있지 않을까? 과연 그렇다. 다이어트 앱이 넘쳐 나는 세상에 간헐적 단식 앱이 없을 리가. 그렇게 엑셀 기록에서 단식 시간 항목이 사라졌다.


akshar-dave-AogXOgHblv8-unsplash.jpg 사진: Unsplash의Akshar Dave�


단식 앱


오랫동안 단식 시작 및 중단 시점을 엑셀 기록으로 남겨 왔다. 그러나 엑셀은 휴대폰 앱에 비해 접근성이 떨어진다. 그래서 엑셀에 기록하기 전까지 그 정보는 내 머리나 다른 곳에 메모로 남아 있어야 한다. 참으로 비싼 정보 저장 방식이다. 데이비드 앨런이 강조하는 것이 기록으로 남겨 머리를 비우라는 것인데, 기록을 남기기 위해 머릿속에 숫자를 기억하려 애쓰는 내 모습을 보고 데이비드 앨런은 무슨 표정을 지을까.


스톱워치를 이용해 기록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스톱워치를 시시때때로 사용한다. 포모도로, 집중 시간 측정 용도로 쓰기도 하고, 의자에서 일어난 지 얼마나 됐는지, 미세먼지나 꽃가루가 심한 날 환기를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끓는 물에 달걀을 넣고 얼마나 지났는지 시간을 재려고 언제나 사용한다.

문득 간헐적 단식을 도와주는 앱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검색해 봤고, 역시 그랬다. 아주 많았다. 워낙 단순한 앱이니 당연하다.


단식 앱도 다양한 기능으로 서로 차별화하려고 한다. 식사 내역을 기록할 수도 있고, 단식 중에 주의해야 할 일을 알려주기도 한다. 나는 단식 시작 시점과 종료 시점만 기록한다. 식사 내역은 삼성 헬스 쪽이 훨씬 좋아 그쪽을 사용한다. 식품별 영양 성분이 fatsecret 데이터베이스와 연동되기 때문이다.


내가 현재 사용하는 앱은 단식 시작 후 시간 경과에 따라 지금 내 몸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 중인지 표시해 준다. 식후 2시간까지는 혈당 상승 중, 그 후에는 혈당 하락 중, 12시간이 지나면 케토시스에 진입했다는 식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냥 응원 문구라고 생각해야 한다. 사람에 따라, 식사 내용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는 상황을 일률적으로 단식 시작 후 경과 시간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게다가 케토시스라니, 언감생심이다. 케톤체 측정을 해본 적은 없지만, 5년 넘게 간헐적 단식을 하면서 나는 케토시스를 경험해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케토시스라는 게 그다지 특별한 느낌이 없는 것이거나.)


기록 용도로 앱을 사용하는 방법의 가장 큰 단점은 역시 기록 보존 문제에 있다. 내가 쓰는 앱은 기록을 다운로드 받을 수 없다. 나는 단지 스톱워치를 대신하는 용도, 그리고 12시간만 지나면 내가 케토시스 상태에 있다는 선의의 거짓말을 보고 기분이 좋아지는 정도의 용도로만 쓰니 상관없다. 내게 필요한 기록은 단식 시작 시점과 종료 시점이 아니라, 그날 식사를 할 때까지 단식을 얼마나 계속했느냐다. 그래서 그 정보, 즉 간헐적 단식 지속 시간을 시간 단위로 끊어서 엑셀 기록으로 남긴다.


나는 기록을 남기는 것을 좋아하고, 수치 기록을 통계 도구로 이리저리 만져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런 종류의 기록은 루틴을 돕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내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생각해 보고, 나와 있는 앱들 중에서 잘 맞는 것을 골라 쓰면 된다. 언제라도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있으니 너무 고민할 필요도 없다. (실제로, 쓰던 앱이 광고 폭탄을 던지기 시작해서 다른 앱으로 갈아탔다.)


jezael-melgoza-fVXCtiOSsgk-unsplash.jpg 광고 폭탄 (사진: Unsplash의Jezael Melgoz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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