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틴으로 갓생 살기 - 책읽기 (1) 책이 주는 위안
책읽기
나는 "책읽기"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단어들이 어느 정도 함께 어울리면 한 단어로 인정해 주는 것이 한글맞춤법인데, 한 단어로 붙여 쓴 "책읽기"가 아직 맞춤법의 세례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독서율 현실을 반영하는 유머 아닌가 생각한다.
"책읽기"를 한 단어로 붙여 쓰지 못할 이유가 없다. 책이라는 대상을 읽는 행위보다, 책과 읽기가 하나가 된 모양에 왠지 더 마음이 가지 않는가. "온책읽기"라는 단어는 이미 한 단어로 인정된다. "온책읽기"는 한 단어인데, "책 읽기"는 꼭 두 단어로 떨어뜨려야 한다니, 서럽다.
나는 원래 책을 읽는 사람이 아니었다. 20년쯤 전에, 자차가 아닌 대중교통으로 출퇴근을 하면 책을 더 읽게 된다는 점을 새삼 깨닫고 놀란 적이 있다. 더 읽었다고 해서 대단한 분량도 아니었다.
그때 6개월 동안 읽은 책이 20여 권 정도였다. 앉은 자리에서 지난 반년 동안 읽은 책을 다 기억해 낼 정도였으니, 독서량이 처참한 수준이라 할 만했다. 대중교통으로 출퇴근을 하면서, 평년보다 많이 읽었다는 것이 그 정도였다.
책을 조금 더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독서토론회 참가를 권유받은 적이 있었다. 책을 많이 읽는 편도 아니고, 책 읽고 남들과 토론해 본 적도 없어서 정중히 거절했다. 그때, 그가 비장의 설득술을 펼쳐 보였다. 1년에 책을 100권 읽는다고 치고, 100년을 살면서 날 때부터 읽어도 겨우 1만 권을 읽을 수 있을 뿐이다.
역시 나는 숫자로 말해줘야 알아듣는 체질인 걸까. 사람이 죽을 때까지 겨우 1만 권도 못 읽는다는 사실이 대단히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런 주제에 세상만사 온갖 주제에 아는 척을 하고 떠들고 다니는 것이 인간이다. mansplan이라는 단어야말로 남자를 넘어서 인간의 그런 본성을 제대로 까발려 주는 단어다.
바로 그해, 처음으로 100권을 읽었다.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이 늦봄이었지만, 꾸역꾸역 100권을 채웠다. 100권을 채우려고 연말에 연가를 내고 집에서 책을 읽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주 웃기는 똥고집이 아닐 수 없다.
그해 가장 좋았던 책은 조너선 스펜스의 <강희제>였다. 그해 마지막으로 읽었던 책은 아미르 액설의 <얽힘>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살면서 처음 1년 100권을 읽은 해라서 기억하는 것이다. 둘 다 아주 좋은 책이다.
책이 주는 위안
언젠가 누군가가 내게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물었다.
회사일로 번아웃에 가까운 기분을 느끼던 시절이었다.
힘들기는 한데, 책이 위로가 된다고 대답했다.
분명히 그냥 한 말이었다. 습관처럼 공수표를 남발한 것이다.
며칠 후에 그 대화가 생각났다. 또 헛소리를 하다니 그냥 입 다물고 있을 걸 그랬다고 자책하는데, 가만히 내가 했던 말을 곱씹어보니 이번에는 헛소리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든 시절을 보내는 데, 책이 도움을 주고 있었다. 괴로운 현재를 잠시 잊게 해줘서 그런 것인지, 다른 사람의 시점이나 더 높은 시점에서 현재를 바라볼 수 있게 해줘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분명히 나는 독서를 통해 위안을 얻고 있었다.
지금 나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책은 내게 필수재다. 의식주를 제외하면, 나는 내가 없이 살 수 없는 것이 단 하나, 음악이라고 생각했다. 무인도에 가게 된다면 챙겨야 하는 목록에 책은 없어도 음악은 있어야 했다. 지금은 물론 책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쯤 되면 무인도에 갈 때 패키지 이사 서비스라도 불러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냥 휴대폰만 챙겨가면 된다. 내 휴대폰에는 독서 앱 2개와 음악 앱 2개가 깔려 있으니까. 그런데 인터넷이 깔려 있는 무인도여야 한다는 점이 좀 걸리기는 한다.
"날 이용해서 외풍을 막게!"
책만 보다 보니 책과 대화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던 조선 시대 간서치, 이덕무의 수필을 즐겁게 읽던 기억이 떠오른다. 맹자가 식량을 조달해 주고, 공자가 바람을 막아주던 그의 좁은 서재에 비하면 21세기는 간서치에게도 참 편리한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