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틴으로 갓생 살기 - 책읽기 (2) 독서의 이익
현대에 태어나 다행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비밀>은 히로스에 료코 주연 영화로도 만들어진, 아주 유명한 작품이다. 소설로서 완성도는 그의 다른 소설들에 비해 별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도 인상 깊은 대목을 만났다. (스포일러이기는 한데, 워낙 유명한 소설/영화이니 그냥 이야기하겠다.)
주인공은 50대 가정주부인데,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딸과 육체가 바뀌었다. 엄마의 영혼이 딸의 몸에 들어가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원래 그녀는 집안일만 하고 아무런 취미도 없이 따분하게 살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학교를 가야 하니 다시 공부를 해야 했다. 그러다가 그만 공부가 취미가 된 것이다. 독서와 공부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나면서 그녀는 생각한다.
"이 세상에 멋있는 게 진짜 많아. 돈도 별로 안 들이고 행복해지는 거, 세계관이 홱 바뀌는 거, 그런 게 간단히 내 손에 들어와. 왜 지금까지 이걸 몰랐는지, 이상할 정도야."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고 감동했을 때,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헤이스케에게 말하곤 했다. (히가시노 게이고, <비밀>, 328쪽)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이 존재하지 않던 시대인데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세상이었다면 그녀는 더욱 감동했을 것이다. 본질적으로 비경쟁재인 정보라는 재화를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지금 세상은, 의식주만 해결되면 누구라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인 것이다. 돈 한 푼 안 들이고 책을 읽을 수 있는 세상이다. 동 단위로 촘촘하게 도서관이 세워져 있는 세상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약용, 그리고 <장미의 이름>의 윌리엄 수사가 지금 시점으로 타임슬립 해 왔다고 생각해 보라. 환희의 송가를 불렀을 것이다.
독서의 이득
책읽기의 좋은 점을 나열하자면, 운동의 좋은 점을 들먹일 때와 마찬가지로 목록이 끝이 없을 것 같다. 비즈니스 플랜을 만드는 것도 아니니, 상호배타적이면서 전체적으로 완전한 (Mutually Exclusive and Collectively Exhaustive, MECE) 목록을 만드는 대신, 생각나는 대로 좋은 점을 몇 가지 살펴보자.
첫째, 가성비가 환상적인 유희 수단이다. 도서관에 가면 공짜로 얼마든지 즐길 거리를 찾을 수 있다. 드는 재화가 있다면 시간 정도인데, 시간을 죽인다는 목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런 대가 없이 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는 시간 활용 방법이다.
둘째, 역시 가성비가 하늘을 찌르는 능력 개발 수단이다. 유튜브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있기는 하지만, 세상에 책으로 배울 수 없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게다가 유튜브처럼 광고를 보거나, 쓸데없는 곁다리 이야기를 참고 들어야 할 필요도 없다. 효과적인 수납 방법이든, 글루텐 프리 베이킹이든, 부상 위험 없는 스쿼트 방법이든, 뭐든지 배울 수 있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말하자면, 언어를 배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역시 책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Teach Yourself> 시리즈와 <무조건 따라 하기> 시리즈는 최강이다.
셋째, 다른 방법으로 얻기 힘든 경험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딱 한 번 살 뿐이다. 남극 도달불능점에 태극기를 세우는 것이 내 버킷리스트에 있다면, 그 목록에 비슷한 크기의 다른 할 일은 아마 넣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책으로는 경험의 지평이 얼마든지 넓어질 수 있다.
<파타고니아 이야기>를 읽으며 수천 미터 상공 벼랑 끝에서 비박을 하는 간접 경험을 해볼 수 있다. <강희제>를 읽으며 대제국 경영이라는 대리 체험이 가능하다. 빅토리아 시대에 벌어진 살인 사건의 전모를 셜록 홈즈와 함께 파헤치는 경험도 할 수 있다.
심지어 아무도 할 수 없는 경험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상상력의 천재들도 많이 있다. 우리는 <삼체>를 통해 빅뱅 후 170억 년 시점에 가볼 수도 있고, <걸리버 여행기>를 통해 존재하지 않는 소인국에 가볼 수도 있으며, <피터 래빗>을 통해 말하는 토끼의 하루를 따라가 볼 수도 있다.
넷째, 대화 소재를 얻을 수 있는 무한한 금광이다. 책이나 영화 이야기를 하지 않고 두세 시간 대화가 가능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책을 소재로 이야기하면 말할 거리가 떨어질 일이 없다. 게다가 책을 읽는 행위 자체가 저자 내지 텍스트와의 대화다. 다른 사람의 시점에 서 보는 것 자체가 대체 불가능한 귀한 경험이다. 그렇게 다른 시점에서 세상을 바라본 경험을, 대화를 통해 다시 나누는 것이 또 한 차례 관점의 지평을 크게 열어젖힌다.
사람은 자신이 가진 물질의 총합이 아니며, 자신의 상태창에 나오는 스펙의 조합도 아니다. 경험의 총합이다.
우리는 남극점을 탐험하는 동시에 우주 유영 세계 신기록에 도전하며 차세대 유전자 조작 기술을 발견하는 삶을 살 수 없다. 그러나 12세기 송나라와 18세기 영국을 비교하고, 우주가 만들어지는 기본 법칙에 대해 상상하며, 셔플 댄스를 추고, 글루텐 프리 시폰 케이크를 만드는 삶을 살 수는 있다. 그 모든 것을 우리는 책에서 시작할 수 있고, 그렇게 하는 것이 그 어떤 방법보다 더 쉽고 가성비가 우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