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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Sep 02. 2024

2차원 세상에서 벌어지는 차별

걸작 <플랫랜드>를 다시 읽으며 생각하는 고전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

에드윈 애벗의 시대를 초월한 과학(수학)소설, 플랫랜드


<삼체>를 다시 읽으며 이것도 다시 읽어야지 하는 생각을 쭉 하고 있었지만, 왠지 미루고 있었다.


고전이란, 다시 읽었을 때 이전에 놓쳤던 빛나는 부분을 발견하게 되는 책이다.



장애인,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사회의 역량


우리에게 도형의 불규칙성은 여러분들의 도덕적 비행과 범죄를 합친 것과 같거나 그 이상의 것이므로 그에 걸맞게 다루어진다. (67쪽)


이 소설의 주인공은 논리적이면서도 유연한 사고를 하는 인물(?)이다. 세제곱이라는 개념에 기하학적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손자의 주장을 일축하지만, 구(sphere)의 지도를 받아 미지의 세상이 존재함을 받아들이며, 그 구조차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n차원에 대한 사유까지 나아가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불규칙 도형에 대해 단호하다 못해 잔인한 단정을 내리는 장면은 당혹스럽다. 물론 이 장면에서 주인공은 한 개인이라기보다 플랫랜드의 일반적 주민을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어쨌든, 불규칙 도형에 대한 그의 입장을 보면서, 나는 장애인이나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한 사회의 태도는 그 사회의 역량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불규칙 도형을 잠재적, 아니 현재적 범죄자로 다루는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플랫랜드라는 사회 자체가 유지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불규칙 도형을 방치할 경우, 건축이 어려워지고 각종 안전사고가 난무할 것이며, 고의든 아니든 불규칙 도형을 어떤 다른 도형으로 착각하여 사기를 비롯한 수많은 사건이 일어날 것이다.


플랫랜드가 이 사태에 대하여 할 수 있는 최선이란, 아직 사고나 범죄를 일으키지 않은 불규칙 도형이라 하더라도 가혹하게 대하고, 더 나아가 그들이 자손을 낳지 못하게 하여 미래의 사고까지도 방지하는 것이다. 어디에서 많이 보던 이야기 아닌가? 나치나 미국 정권이 과거 유대인과 흑인에 대해 취하던 스탠스다.


인종 개념이나 골상학, 사회진화론 같은 이야기가 우습게 들리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 수준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시민 사회의 성숙에 따라, 우리는 이제 여성, 흑인,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들을 차별하지 않아도 사회가 굴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인류가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은, 그럴 만한 역량이 없었기 때문이다. 플랫랜드가 지금 그렇듯 말이다.




다른 존재의 입장에 선다는 것의 어려움


"존재의 무한한 행복이여! 그것이 존재하며, 그것 외에는 아무도 행복하지 않다." (192쪽)


이는 0차원의 세계, 즉 포인트랜드에서 들려오는 말을 주인공이 적은 것이다. 주인공과 주인공의 스승(구)은 포인트랜드의 존재를 "하찮은 존재"라고 부르며 무시한다. 이 소설이 의도하는 것이 고차원에 대한 유추적 사고라는 것을 감안하면, 당연한 전개다.


그러나 현재의 내게 포인트랜드는 마치 깨달음의 경지로 보인다. 폐쇄증후군, 즉 감각 신경은 살아 있으나 운동 신경이 모두 마비되어 외부 세계와 소통이 불가능한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생각하면, 대개 그런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연구에 따르면 이들의 행복 수준이 오히려 정상인들보다 높다고 한다. 


<행복 = 실제 / 기대>라는 공식에서 분모를 작게 수축시킨 결과다. 같은 이야기를 포인트랜드의 존재에게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은 2차원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역정 내는 라인랜드의 왕을 비웃지만, 자신도 3차원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몰이해는 고차원에 대해 국한된, 즉 방향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라인랜드와 포인트랜드에 대해서도 쉽게 결론 내린다.



<플랫랜드>가 직접 던지는 메시지


책을 처음 읽을 때는 당연히 책이 의도하는 주제를 따라 읽게 된다. 이 책의 주제는 첫째, 플랫랜드의 설명을 통해 다양한 차원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며, 둘째, 플랫랜드의 우화를 통해 진리를 외면해 온 인류 역사의 어리석음을 돌아보는 것이다.


<삼체> 3부를 읽으며 이 책에 대해 생각했다. 4차원을 처음 조우하는 선원들의 경험이 정확하게 이 소설의 묘사와 같기 때문이다. <플랫랜드>가 세상에 나온 것은 1884년이다. <삼체>보다 100년도 훨씬 전에 n차원에 대한 묘사를 정확하게, 즉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


3차원의 우리가 플랫랜드에 사는 2차원 존재의 몸속을 보는 것은 당연하다. 4차원에서 바라보면, 3차원인 우리들의 몸속이 보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플랫랜드의 주인공은 라인랜드의 1차원 존재의 몸속, 즉 선분의 중간 부분을 볼 수 있다.


손자가 주인공에게 주장하는 3차원의 가능성, 즉 사각형을 그대로 평행 이동하여 얻어지는 직육면체에 대하여 주인공은 얼토당토않은 소리라며 꾸짖는다. 그러나 곧, 그는 3차원의 세계로 이동하여 그것이 사실임을 깨닫는다. 주인공은 같은 방식으로 정육면체를 4차원 방향으로 평행이동 하여 4차원 개체를 얻을 수 있다는, 당연한 논리를 말하지만, 주인공에게 3차원을 일깨워준 구(sphere)는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라며 다그친다.


이 책의 두 번째 주제, 즉 진리를 외면해 온 인류 역사에 대한 우화는 훨씬 더 직설적이다. 주인공은 3차원에 대한 믿음 때문에 종신형에 처해지는데, 이때 돌아서며 "그래도 3차원은 존재해"라고 혼잣말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미신으로 안정된 사회에 진리는 필요하지 않다. 아니, 위험하다. 그렇게 질식당한 진리에 관한 에피소드는 인류 역사에서 무수히 발견되며,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에드윈 애벗 또한 그걸 질타하기 위해 이러한 결말을 그려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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