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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May 08. 2023

사과파이를 구우려면 일단 재료부터

[책을 읽고] 해리 클리프, <맨땅에서 애플파이 만들기> (1)

현대물리학 교양서도 참 많다. 스티븐 호킹, 브라이언 그린, 카를로 로벨리 등 최고의 과학자들이 정말 좋은 책들을 많이 써주었지만, 아직도 공백은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수학을 동원하지 않고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스티븐 호킹은 <시간의 역사>를 쓰면서, 수식 하나를 쓸 때마다 판매부수가 반으로 줄 것이라는 조언을 들었지만, 단 한 개의 수식, 즉 E=MC2를 포함시킬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안다. 스티븐 호킹은 글의 전개에 필요해서 아니라, 선배 과학자에 대한 존경심에서 그 수식을 포함시켰다는 것을. 내가 읽었던 어떤 책은, 순전히 아름답다는 이유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적성 원리 수식을 써 놓았다. 역시, 그냥 좋아서 쓴 것이다. 수학 책을 쓰는 사람이라면 오일러의 항등식을 쓰고 싶어 오금이 저릴 것이다.


힉스 보손(힉스 입자)의 존재를 과학계가 인정한 지 10년이 넘게 지났다. 유의 수준 5%조차 지키지 않는 논문이 즐비한 의학계, 그리고 유의 수준이 뭔지도 모르는 행동경제학 및 심리학계의 실험들을 생각하면, 5시그마 원칙을 지키기 위해 추가 실험을 강행한 CERN의 과학자들의 양심이 빛나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들은 4.2시그마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뭐, 그런 원칙에 이미 합의했다고는 해도, 이미 합의한 원칙을 깨는 일을 우리는 정치판에서 종종 목격한다.)


책을 읽기 전에 내가 힉스 입자에 대해 알던 것을 적어본다. 질량을 매개하는 입자. 표준모형(CDM) 일병을 구하기 위해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입자. 5시그마 원칙에 의해 유의 수준  0.00006%로 증명된 실험 결과. 그래서 80대의 나이에 가까스로 노벨물리학상을 품에 안은 피터 힉스. 그게 다였다.


초대칭이라는 대담한 이론 체계가 힉스장 다음을 정당화하기 위해 고안되었다는 것도, 초대칭 짝이 아직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도, 관련 연구에 필요한 입자가속기를 인류가 영원히 만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초대칭에 관해서는 예전에 어떤 다른 책에서 읽었지만, 한마디로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듯 읽은 것이다.


쿼크와 렙톤 (stable diffusion 1.5 작)


표준모형이라는 누더기 덩어리


이 많은 입자들은 대체 왜 존재하는 것일까? 과거에는 새로운 입자를 발견한 사람에게 노벨상을 주었지만, 지금은 벌금을 물려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316쪽)


바로 이 점에 동감하는 것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중학교 때 쿼크와 렙톤에 관해 읽으면서, 거기가 끝일 것이라 생각했다. (이 믿음은 내가 대학 전공을 택하는 데 있어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던 어떤 사람(의 이공계 우대 정책), 그리고 볼프강 파울리와 함께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세계에 대한 물리학의 설명은 깔끔해야 한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나 표준모형, 즉 Lambda-CDM은 갈수록 점점 더 지저분해지고 있다. 하긴, 주기율표도 계통수도 예전에 비해 상당히 지저분해졌다. 그러나 물리학만큼은 아니다. 세계의 구성 성분 중 4.6%만을 설명하면서, 아니, 그것도 제대로 설명하지도 못하면서 세계를 설명한다는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웃기지 않는가?


모든 입자들은 자신만의 양자장에 대응한다. 그러나 양자장들은 또한 서로 간섭한다. 따라서, 예컨대 전자는 단순히 전자장의 잔물결이 아니라 전자장의 잔물결에 다른 모든 양자장의 왜곡이 더해진 결과다. 이 왜곡을 저자는 전자가 '입고 있는 옷'이라 비유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 옷에는 (CDM이 옳다면) 암흑물질 양자장으로 짠 실도 몇 가닥 있어야 한다.


바로 이것을 연구하는 실험실 중 하나가 런던 어느 건물의 지하실에 있다. 놀랍지 않은가? 그건 그냥 지하실이다. 3개 국가의 국경을 가로지르는 원형 터널(LHC)도 아니고, 우주배경복사를 포함한 모든 잡음을 차단하기 위해 땅굴 속 깊이 숨겨놓은 거대 물통(보렉시노)도 아니다. (이건 아주 쓸데없는 사담인데, 나는 보렉시노는 아니지만 그것의 좀 작은 버전도 견학했고, CERN도 견학했다. 그 당시에는 그것들이 그렇게 대단한 것들인지 몰랐지만.)


런던 중심부의 조그만 지하실험실에서 수십억 유로도 아니고 수백만 유로의 푼돈(?)으로, 세계 최대 연구소의 물리학자 수천 명이 그토록 찾으려고 애쓰는 바로 그 양자장을 정교하게 걷어내겠다니, 이 얼마나 황당하면서도 야무진 꿈인가! (397쪽)


런던 실험팀은 2011년에 첫 번째 결과를 발표했다. 전자는 10^-27e cm의 오차범위 안에서 구형이었다. 전자가 태양계 크기라면, 완벽한 구형에서 머리카락 한 올 정도 울퉁불퉁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우리가 모르는 어떤 새로운 물질의 양자장 간섭이 거의 없다는 얘기다. 다시 말하지만, 이 실험이 노린 것은 암흑물질 양자장에 의한 왜곡을 탐지하는 것이었다. 표준모형이 틀렸다는 쪽으로 또 한 번 무게추가 기울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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