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다섯 편
엘리자베스 개스켈, <회색 여인>
여인의 삶을 다룬, 여류 작가의 작품 모음집.
두 번째 에피소드, <마녀 로이스>가 중심에 있다.
1692년 세일럼 마녀 재판을 다루었다.
의외로, 가해자들은 불과 몇 년 후에 자신들이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광기에 휩싸여 수많은 사람들을 죽여 놓고, 잘못했으니 용서해 달라 말하는 그들이 뻔뻔스러워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세상에는 이보다 더한 학살을 자행하고도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악당들이 더 많다.
개스켈의 작품은 공통적으로 서론이 너무 길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겠다는 건지 확인하고 싶은데, 그냥 계속 이야기를 끈다.
이건 분명히 지루하고,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책을 덮게 하는 강력한 유인이 된다.
그러나 <마녀 로이스>의 경우, 분명히 좋은 효과를 가지고 있다.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몇 사람들에 대한 빌드업,
이것은 나중에 타오르는 사건의 중심에서
각각의 인물이 어떤 감정과 생각으로 움직이는지를
생생하고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박세영, <수를 놓는 소년>
역사적 사실의 단편을 가지고, 소설 하나를 뚝딱 만들어낸 작가의 능력이 놀랍다.
이야기의 전개는 대단히 진부하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각각의 인물들은 다채롭다.
계속해서 선악의 경계를 뛰어 넘는 인물들의 행동은, 예사롭지 않다.
진씨 부인, 세자빈, 사부는 물론, 나중에는 부카마저 의외의 면모를 보여준다.
김호연, <연적>
아마도, 김호연 소설 중 제일 재미있게 읽은 것 같다.
다만, 전반부의 브로맨스에서 소설을 끝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후반부의 복수는 뻔하고 재미없음은 물론, 전개도 너무 느리다.
전반부의 브로맨스에서 느린 전개는 플러스 요소다.
그러나 후반부의 복수극에서는, 글쎄다.
요약하면,
억지로 악당을 등장시켜 그를 벌하는 전개를 자제하고,
두 연적의 브로맨스에서 끝냈다면 훨씬 더 좋았을 것 같다.
이비 우즈, <사라진 서점>
그럭저럭 재미있게 읽었지만, 대체 이렇게 길게 써야 할 이유가 있을까?
정유정의 <7년의 밤>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
분량을 1/4로 줄였다면 훨씬 더 좋았을 거다.
그라실리아누 하무스, <메마른 삶>
브라질의 윌리엄 포크너라 불리는 작가라 한다.
윌리엄 포크너는 내 최애 작가 중 한 명이다.
<음향과 분노>, <내가 죽어갈 때>는 물론, 아무도 안 읽을 <압살롬, 압살롬>까지 읽었다.
(이걸 읽는다는 것은, 샐린저의 <프래니와 주이>를 읽는다는 것과 동치의 명제다. 제대로 미친 수준의 광팬이라는 증거다. 나는 물론 <프래니와 주이>도 읽었다.)
각설하고, <메마른 삶>은 윌리엄 포크너와는 대단히 다르지만, 엄청난 걸작이다.
고전이다.
파비아누와 그의 아내 빅토리아, 이름도 나오지 않는 두 아이, 그리고 그들의 충직한 반려견 발레이아.
이들은 가뭄으로 황폐해진 땅을 떠돈다.
어떻게 해도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한 그들은 반려 앵무새를 잡아 먹고, 어떤 빈집을 발견한다.
가뭄을 피해 집을 버리고 떠났던 주인이 돌아오자, 그들은 하인이 되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그래서 새로 시작된 소작 생활.
소작 대상은 땅이 아니고, 가축들이다.
그러나 어떻게 해도 그들은 점점 더 가난해진다.
빚은 늘어나고, 돼지고기를 팔다가 벌금까지 물게 된다.
글도 모르는 그들에게 법을 들이대는 가혹한 세상.
가죽 침대를 가져봤으면 하는 헛된 꿈을 꾸는 빅토리아,
그 꿈을 남편 파비아누는 이해할 수 없다.
어차피 떠도는 삶이다.
침대를 어떻게 들쳐 업고 다닌단 말인가?
너무 늙고 병들어 먹이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발레이아를 죽이는 장면이, 아마도 이 소설의 절정일 것이다.
다시 야반도주의 길에 오르는 그들을 보여주며 소설은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