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작별하지 않는, 하나의 이미지
<소년이 온다>는, 굳이 분류하자면 옴니버스다.
반면, <작별하지 않는다>는 하나의 시선을 따라가는데, '경하'라는 관찰자의 것이다.
<소년이 온다>의 분산된 묘사와 달리, 집요하게 반복되는 이미지가 있다.
도입부에 강렬하게 등장하는, 바닷가의 나무들이다.
지금 밀물이 밀려오는 거다.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물었다.
왜 이런 데다 무덤을 쓴 거야? (10쪽)
경하는 무덤 속의 뼈라도 수습하려고, 밀물이 더 들이치기 전에 뭐라도 하려고 맹렬히 움직이지만,
그녀에게는 삽도 없고, 물이 들어차는 속도는 너무 빠르다.
그리고 그녀는 꿈에서 깬다.
거의 책의 말미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이 꿈의 결론에 다다른다.
결국 엄마는 실패했어.
먼 곳에서 들리는 듯 인선의 목소리가 낮아진다.
뼈를 찾지 못햇어. 단 한 조각도. (286쪽)
제주 학살, 그리고 보도연맹 학살에 휩쓸려 죽어갔을 오빠의 유해를 찾기 위해,
인선의 어머니는 60년 가까운 세월을 맹렬하게 살았다.
치매에 걸려 어릴 적 기억과 현재를 혼동하고,
딸을 언니라 부르는 어머니의 병 수발에 지쳐가던 인선은 죽고 싶다고 생각한다.
점점 더 잠 자는 시간이 길어지는 어머니의 병 수발에 익숙해질 때 즈음,
결국 어머니는 인선을 떠나고 만다.
더 이상 죽어서 벗어날 필요가 없는데 계속해서 죽고 싶었어. (314쪽)
결국, 인선을 살게 한 것은 어머니의 유지를 잇는 삶이었다.
어머니의 뒤를 이어 보도연맹 학살로 코발트 광산에서 총살당한 사람들의 기록을 뒤쫓는다. 그러면서,
자료가 쌓여가며 윤곽이 선명해지던 어느 시점부터 스스로가 변형되는 걸 느꼈어. 인간이 인간에게 어떤 일을 저지른다 해도 더이상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상태. (중략) 그게 엄마가 다녀온 곳이란 걸 나는 알았어. (316쪽)
스릴러, 로맨스
책의 종반 1/3이 되어야 등장하는 제주 학살은, 물론 이 책의 핵심 주제다.
그러나 그 알맹이를 감싸고 있는 액자 자체는 스릴러다.
작업 중 심하게 다쳐 병원에 입원한 친구 인선의 부탁으로,
경하는 제주도 산골짜기 외딴 집에 남아 죽어가는 앵무새 '아마'를 구하러 간다.
빛도 없는 밤, 눈 내리는 외딴 길을 걷다 그녀는 미끄러져 다치기도 하면서,
간신히 기어 인선의 집에 도착한다.
아마는 이미 죽었다.
새를 매장해 주고 정전된 집으로 들어서는 그녀에게 문득 서울 병원에 있어야 할 인선이 말을 건넨다.
그리고 기나긴 이야기가 시작된다.
마지막 성냥 개비가 불 붙어 타올랐을 때, 경하는, 인선은 어디에 있었을까?
짧디 짧은 작가의 말에서 한강 작가가 말하듯, 이 책의 결말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고 믿고 싶다.
전혀 다른 시간과 장소, 같은 사람들
정부에서 내려온 할당 인원을 채우느라 이장과 통장이 임의로 적어 올린 사람들 (273쪽)
보도연맹 학살 사건에 휘말려 죽은 사람들 중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았다.
유발 하라리의 <넥서스>에 따르면, 인쇄술이 보급되어 출판이 한창이던 근대,
<마녀의 망치(마녀 잡는 망치)>라는 책이 베스트셀러로 크게 유행했다.
마녀를 알아내는 방법, 즉 고문 방법이 상세히 적힌 책이었다.
마녀로 몰린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을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1920년대 소련에서는 쿨라크(반동분자) 청산 운동이 대대적으로 펼쳐졌다.
누가 반동분자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소련 인민의 몇 퍼센트 정도는 쿨라크일 수밖에 없었고, 이들이 죄다 수용소에서 교화되어야 했다.
그래서, 할당된 인원을 채우는 것은 우리로 치자면 마을의 이장, 통장일 수밖에 없었다.
누가 쿨라크로 지명되었을까?
또 다시,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경북 지역에서도 똑같은 일이 다시 벌어졌다.
시간과 장소라는 맥락이 전혀 다른데도, 같은 일들을 계속해서 벌이는 악마들.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이 악마들에게는, 스탈린이 말한 것처럼, 단지 숫자에 불과했을 것이다.
이 사람이 유족회장이야. 이듬해 5월 군사 쿠데타 직후에 체포돼서 사형 언도를 받았어. (27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