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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다시 쓴 유토피아

[책을 읽고] 야니스 바루파키스, <테크노퓨달리즘>

by 히말

<유토피아>를 읽으면 즐겁다.

꿈꾸던 세상, 그야말로 유토피아를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지만,

내가 그 유토피아에 살 일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토피아에 내가 산다고 상상하면, 곧바로 '지금은 곤란하다'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그런 의미에서, 야니스 바루파키스의 담대한 저서, <테크노퓨달리즘>은

21세기에 다시 쓴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다.


토마스 모어의 오리지널과 마찬가지로, 그의 유토피아는 실현될 가능성이 없다.

그래서 아름답지만, 공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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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니스 바루파키스


야니스 바루파키스란 누구인가?

그는 단지 상아탑 경제학자가 아니다.

그리스 정부에서 재무장관을 지냈던 사람이다.


재무장관에 대해서 경외심을 가질 이유는 1도 없지만,

경제학자 출신이라면 조금 생각이 달라진다.

그러나 그건 책을 읽기 전까지의 생각이다.

책을 읽고 나면, 이 사람 정말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생각을 금할 길이 없다.


그는 공산주의자다.


소련인 경제학자 콘드라티예프가 자본주의의 핵심을 꿰뚫어본 것처럼,

대놓고 공산주의자인 야니스 바루파키스 역시 지금 자본주의가 처한 문제를 잘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현재 자본주의가 처한 상황을 진단한 책의 전반부(대부분이다)는 그야말로 통찰의 향연이다.


문제는, 앞서 말했듯이, 유토피아로 흘러가 버린 처방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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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이야기


글을 읽고 나면 아무래도 끝부분이 기억에 남게 된다.

그래서 저자의 통찰은 이 글의 뒤에서 이야기하기로 하자.

우선은, 서글프다 못해 약간 웃기기까지 하는 그의 유토피아 이야기를 살펴보자.


저자의 해법은 어떻게 보면 심각할 정도로 단순하다.

모든 회사를 협동조합화 하는 것이다.


사장부터 신입사원까지, 모두가 주식 1주를 가지고 의사결정에 참여한다.

시장에 판매되는 주식은 없다.

끝.


이렇게 되면 민주적 의사결정이 이뤄질 것이고,

경제를 박살낸 대죄를 지은 장본인들이 오히려 부자가 되는

2008년 금융위기 같은 사태가 벌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국제 대차대조표는 '코스모스'라는 SDR 유사체를 만들어서 유지된다.

이 체계에서는 무역흑자국이나 적자국이나 동일하게 페널티를 받는다.

이쯤 되면, 생각이 너무 단순한 나머지 생각을 하다 멈춘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모든 무역과 모든 화폐의 이전이 새로운 디지털 국제 회계 단위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새로운 아이디어의 핵심이에요. 저는 그 디지털 통화 단위에 ‘코스모스Kosmos’라는 이름을 붙였죠. 만약 어떤 나라가 코스모스 환산 기준으로 수출보다 수입이 많다면, 그 무역적자에 상응하는 불균형 부과금imbalance levy 처분을 받아요. 마찬가지로 어떤 나라의 수출이 수입을 능가한다면 그 무역 흑자에 해당하는 만큼의 불균형 부과금 처분을 받게 되겠죠. 이로써 각국이 지니고 있는 중상주의적 열망은 해소됩니다. (7장 중)


이게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동일한 방식으로 처리해서 대차대조표 균형을 세우겠다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자 본인에게 물어도 아마 대답을 하지 못할 것이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이야기는 흥미롭다.

그러나 그건 우리가 그 세계에 살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절대 실현될 가능성이 없는 야니스 바루파키스의 유토피아는 왜 흥미롭지 않을까?

토마스 모어는 16세기 사람이고, 이 사람은 우리 시대 사람이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역시 당대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열받는 이야기였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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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아니 기술 봉건주의


이 책의 제목이 보여주듯, 그는 우리가 봉건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페이스북과 구글이라는 기술 영주들이 다스리는, 기술 봉건주의다.

우리가 기술 봉건주의의 초기에 살고 있어, 아직 그걸 모르고 있을 뿐이라 한다.


이 통찰에 대해서는, 스콧 갤러웨이가 그의 명저 <플랫폼 제국의 미래>에서 이미 명확하게 제시한 바 있다.

기술 봉건주의에 대한 설명으로는 이 책보다 <플랫폼 제국의 미래>가 훨씬 좋다고 생각한다.


https://brunch.co.kr/@junatul/201


그러나 야니스 바루파키스의 통찰력 역시 주목할 만하다.

그는 플랫폼 영주들에 국한하지 않고,

국제 달러 시스템이나 암호화폐, 2008년 경제 위기에 대한 대처 등에 대해서도 예리한 통찰을 보여준다.


예컨대, 유럽이 국제 달러 시스템에 대항하는 진정한 행보를 보이지 않는 이유는,

유로가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국제 달러 시스템에서 막대한 이득을 보는 독일, 네덜란드 같은 경제강국의 이익에 반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미국과 달러 흑자국의 이기심으로 유지되는 국제 달러 시스템에서,

달러를 찍지도, 달러를 벌지도 못하는 국가들은 매우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프랑스, 그리스, 인도처럼 ‘평범한’ 무역적자국이 자국의 화폐 가치를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달러를 빌려와서 지불 능력을 유지해야 하고, 동시에 돈이 해외로 새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금리를 인상해야겠죠. (6장 중)


우리나라는 달러를 찍지는 못해도 달러를 버는 나라에 속해 있다.

그래서 아르헨티나나 PIIGS 국가들의 애환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기술 봉건주의가 불러온 신냉전


그는 또한 유발 하라리가 <넥서스>에서 우려를 표명한,

클라우드 세상에서 벌어지는 미-중 냉전에 대해서도 말한다.


바이든 정부는 반도체 수출통제로 인공지능 개발이라는 영역에서 미-중 냉전을 유발하기도 했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에 맞서 러시아 자산 동결이라는 위험한 카드를 플레이하고 말았다.


달러 자산이 언제든지 동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디지털 위안화를 조금쯤은 들고 있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미국이 양심의 가책 없이 휘두른 이 두 가지 행위로 인해

중국이 가려고 했던 그 길을 더욱 뚜벅뚜벅 걸어가게 되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다시 말해, 딥시크도 화웨이도, 미국이 중국을 낭떠러지 밑으로 떠민 결과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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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차례 돈지랄이 불러온 기술 봉건주의


페이스북과 구글은 그렇다면 워낙 기술이 훌륭해서 지금처럼 초거대기업이 된 걸까?

저자는 매우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공한다.

재무학에 능통한 경제학자가 할 만한 설명이다.


모두 알다시피, 2008년 금융위기와 코로나-19에서 미국을 위시한 세계 정부의 대처는 똑같았다.

돈을 풀어 위기를 모면해 보자는 것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세상이 그대로인 상태에서 돈을 마구 찍어내면 단지 돈 가치가 떨어질 뿐이다.

이 두 차례의 돈지랄로 찍어낸 돈들은 대개 자산시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자산시장에는 이미 상장에 성공한 기술 영주들의 기업들이 있었다.

(이미 상장을 안 했어도, 넘쳐나는 돈들로 상장이 훨씬 쉬워졌다.)


이렇게 몰려든 돈으로, 기술 영주들은 대단히 싼 금리에 필요한 자본을 축적했다.

그렇게, 기술 봉건주의로의 전환은 가속화되었다.


클라우드 영주들은 중앙은행의 돈으로 새로운 제국을 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4장 중)


수요가 견인되지 않는 상황,

특히 2008년 금융위기 때처럼 돈을 찍어 (은행을 통해) 부자들에게 뿌리는 상황에서

자산 시장에만 돈이 몰려 버블을 형성하는 것은 일견 당연한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중앙은행의 실수는 단지 돈을 많이 찍어낸 것만이 아닌 것이다. 주류 경제 논객들은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냈다는 점을 비판하면서도 이 긴축 재정 부분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는데, 이는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5장 중)


돈을 찍어 수요를 견인하는 방법은 아주 여러 가지가 있다.

코로나-19 때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분배하는 방법이 제일 직관적이지만,

정부지출이라는 아주 전통적이며 역사적으로 효과가 입증된 방법도 있다.


그러나 중앙은행과 정부는 실수(?)로 그 길을 가지 않았다.

빈부격차를 더 벌리고, 자산시장에 버블이 커지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Ben-Bernanke-scaled.jpg 악마의 미소


기타 흥미로운 통찰들 (인용 only)


암호화폐가 대중적 관심을 끌고 성공한 바로 그 순간, 그것이 화폐 노릇을 하지 못할 거라는 건 분명해졌어요. 초기 투자자들은 점점 더 부자가 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돈놀이를 하려 달려드는 일종의 피라미드 사기 같은 게 되는 결말을 피할 수 없게 된 겁니다. (7장 중)


좌파들은 ‘여성’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억압의 순위가 어떻게 되는가, 같은 온갖 문제를 두고 벌이는 내전에 사로잡혀 있어요. (7장 중)


1970, 80년대 당시 전 세계 개발도상국이 겪었던 고통은 미국의 이자율이 4퍼센트에서 20퍼센트로 급상승한 데 주로 기인하고 있었다. 오늘날 미국의 이자율은 훨씬 낮은 수준으로 떨어져 있다. 하지만 세계의 개발도상국들이 겪고 있는 고통은 1970년대나 80년대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달러의 가치 자체가 15퍼센트 가량 높게 평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6장 중)


EU는 워싱턴의 말에 따라 우크라이나 재건 비용을 낼 것이다. 하지만 EU의 대표성 문제가 진지하게 논의된 적은 없다. 이것이 대륙 단위에서 벌어지는 ‘(미국 독립 전쟁을 야기했던)대표 없는 조세’가 아니고 무엇인가! (6장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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