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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쓰는 데 필요한 시간

by 히말

소설 <가시고기>에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아들의 수술비가 필요한 소설가 아빠에게, 출판사 편집자가 시집을 써달라고 부탁한다.

하룻밤 정도 바짝 쓰면 시집 하나 쓸 수 있으니, 팔릴 만한 달달한 문구로 뚝딱 써달라는 요청이다.


두보나 존 키츠가 들으면 기절할 만한 이야기지만, 사실이다.

술 한 모금에 일필휘지했다는 이백은 물론이고,

하이쿠의 대가 바쇼나 음주 시작의 대가 딜런 토마스도 시 하나 쓰는 데 몇 분 안 걸렸을 것이다.


시집을 수십 개씩 펴내는 수많은 시인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지하철 스크린 도어나 산책로 플래카드에 걸려 있는 글자들을 보면,

사실 누구나 알고 있는 불편한 진실일 뿐이다.


나는 물론 이런 시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시어란 위스키처럼 정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백의 시가 멋져 보일지는 몰라도,

두보의 시처럼 가슴을 시리게 하지는 않는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인은 실비아 플래스다.

그녀가 시를 어떻게 썼는지, 얼마나 시간과 공을 들여 써쓴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결과물은 매우 정제된 느낌이다.


솔직히 말해,

정제되다 못해 맥락이 삭제되어 대체 무슨 뜻인지 알기도 어렵기 때문에

난 그녀의 시를 좋아한다.


1e3f27c800fabc4d89607089f91395d77c6ab409.jpeg 물론 그녀의 비극적인 인생사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지만, 나는 그녀의 시를 좋아한 다음에 그녀의 삶에 대해 알게 되었다


(아마 아무도 읽지 않을) 에즈라 파운드는 수십 권의 시를 썼지만,

가장 사랑받고 있는 것은 단 두 줄 짜리 시다.

이 두 줄에 소요된 시간과 고민은 그의 대표작(?) Cantos의 반 챕터 분량은 되지 않을까.


The apparition of these faces in the crowd:
Petals on a wet, black bough. ("In a Station of the Metro" by Ezra Pound)


물론 이 시가 뚝딱 나왔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조식, 이백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뚝딱 시를 지어내는 장면이 역사에 남아 있다.


단지 시 한 편만이 알려져 있는 치디옥 티치본도,

사형을 기다리는 하룻밤 사이에 그 유명한 시를 썼다.

(물론, 이 경우는 그 하룻밤의 밀도가 엄청났을 테니 직접 비교는 불공정하다.)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의 "The Red Wheelbarrow"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시다.

이것 역시 뚝딱 나왔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so much depends

upon

a red wheel

barrow

glazed with rain

water

beside the white

chickens


어휴.

나는 아주 싫어하는 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1Q84>의 엔딩 부분에서,

"이렇게 엄청난 고난"을 이겨낸 두 사람의 미래는 어쩌구 저쩌구하는 문장을 썼다.


주인공들이 "엄청난 고난"을 겪었다면 그걸 서술하면 된다.

뭔가를 써 놓았는데, 그걸 독자들이 엄청난 고난이라고 받아들일지 자신이 없어

"엄청난 고난"이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내가 저 시를 우습다고 생각하는 이유 또한 같다.

so much가 뭔데?

시에 so much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다.


이건 매우 아름다운 시다, 라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MagrittePipe.jpg


실비아 플래스의 시들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 Ariel을 옮겨 본다.

나는 이 시가, 수많은 잠 못 이루는 밤과 새벽맞이를 거쳐 탄생했다고 생각한다.


Stasis in darkness.

Then the substanceless blue

Pour of tor and distances.


God’s lioness,

How one we grow,

Pivot of heels and knees!—The furrow


Splits and passes, sister to

The brown arc

Of the neck I cannot catch,


Nigger-eye

Berries cast dark

Hooks—


Black sweet blood mouthfuls,

Shadows.

Something else


Hauls me through air—

Thighs, hair;

Flakes from my heels.


White

Godiva, I unpeel—

Dead hands, dead stringencies.


And now I

Foam to wheat, a glitter of seas.

The child’s cry


Melts in the wall.

And I

Am the arrow,


The dew that flies

Suicidal, at one with the drive

Into the red


Eye, the cauldron of mor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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