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식성 책사냥꾼] <명화로 보는 단테의 신곡>
지옥을 건너는 산 영혼
외젠 들라크루아는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으로 유명한 낭만주의의 거장이다. 당시 프랑스 미술계를 장악한 앵그르의 신고전주의에 맞서 낭만주의를 제창한 화가다. 몰개성적이고 정확한 묘사에 치중한 신고전주의에 대항하여, 낭만주의는 창작자 자신의 감정 묘사를 강조하였다. 독일의 낭만주의 화가였던 프리드리히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예술가는 자신의 앞에 보이는 것뿐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도 그릴 줄 알아야 한다."
낭만주의의 거장으로는 영국의 터너, 독일의 프리드리히, 그리고 프랑스의 들라크루아를 꼽는다. 그런 들라크루아의 살롱 데뷔작이 바로 <단테의 배>다.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지옥 여행에 나선 단테가 카론의 배를 타고 지옥의 강 스틱스를 건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낭만주의는 창작자의 감정을 묘사하기 위해 극적인 장면을 채용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프리드리히의 대표작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는 바위산 정상에서 구름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의 뒷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런 멋진 풍경을 보려면 어디를 가야 할까? 안타깝게도, 이 풍경은 프리드리히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다. 극적인 연출을 위해서라면, 존재하지 않는 풍경이라도 그려내는 것이 낭만주의의 정신이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지옥에 흐르는 강 스틱스와 그 강을 건너는 카론의 배만큼이나 극적인 장면도 흔치 않을 것이다. 살아 있는 여행자를 보고 혼란에 빠진 지옥의 영혼들이 카론의 뱃자락을 붙잡고 울부짖는 장면을 묘사하는 그림이 <단테의 배>다. 실존하지 않는 장면이라도 실제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면 존재 가치가 충분하다는 낭만주의자 들라크루아의 그림답다.
그림의 한 가운데에는 단테의 스승이자 인도자인 베르길리우스가 자리한다. 그는 침착한 표정으로 배로 달려드는 영혼들을 바라보며 단테의 손을 잡고 있다. 단테는 이와 대조적으로 놀란 모습이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베르길리우스에게 기대면서, 오른손을 높이 들어 영혼들을 뿌리치려 하는 모습이다. 등을 보이는 뱃사공 카론은 영혼들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튀어 오를 듯한 광배근으로 노를 내젓는다.
흉측한 물체가 배를 전복시키기 위해 양손을 뻗어 배를 움켜잡으려는 순간 베르길리우스가 재빨리 그를 밀쳐냈다. 그는 피렌체에서 심술궂기로 악명이 높았던 필리포 아르젠티의 영혼이었다. 그는 자신의 의도를 채우기도 전에 늪 속으로 나가떨어졌고, 진흙투성이의 다른 무리가 그를 갈기갈기 찢어발기기 위해 달려들었다. (68쪽)
단테의 <신곡>은 기독교 최고의 서사시로 꼽힌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그림이나 음악은 무수히 많다. 지옥의 뱃사공 카론의 배에 올라탄 산 영혼 단테. 이렇게 극적인 장면을 묘사하려 한 화가도 한둘이 아니다.
<명화로 보는 단테의 신곡>은 그런 명화들을 풍부하게 수록하고 있다. 단순히 삽화를 포함하는 이야기책과는 다르다. 단테가 카론의 배에 몸을 싣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으로는 들라크루아의 그림이 아마도 제일 유명할 것이다. 하지만 이 극적인 장면을 묘사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삽화를 포함하여 많은 미술 작품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순수와 경험의 노래>를 쓴 그가 경험 세계의 극단을 묘사한 단테의 지옥 편을 그냥 지나칠 리가 없지 않은가. 블레이크 역시 단테의 배를 묘사한다. 훨씬 더 단순해 보이는 작품이지만, 내쳐지는 필리포 아르젠티의 표정을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블레이크의 그림 옆 페이지에 나란히 실린 귀스타브 도레의 작품을 보자. 같은 장면이지만, 필리포 아르젠티는 뒷모습만을 보이고 있다. 그가 지옥의 강으로 다시 떨어지면서 어떤 표정을 짓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신의 눈, 화가의 눈
파울로와 프란체스카는 단테와 동시대의 사람들이다. 불구인 형을 대신해 형의 약혼녀 프란체스카를 만난 파울로는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프란체스카 역시 파울로에게 빠져든다. 키스하던 둘은 형에게 발각되어 죽임을 당한다. 그들은 '죽어서도 헤어지지 못하는' 형벌을 받게 된다.
잠깐. '형벌'이라고? 사랑하던 둘이 죽어서도 헤어지지 못하는 것이 어째서 형벌일까? 그리고 사랑은 왜 죄일까? 그들은 왜 지옥에 떨어졌을까? 신의 잣대는 이들에게 지옥행을 선언했을지 모르나, 화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역시 낭만주의 화가인 아리 셰퍼의 작품 <파울로와 프란체스카>를 보자. 옆에서 지켜보는 두 사람, 붉은 옷의 단테와 푸른 옷의 베르길리우스를 제외하면 이 작품은 사랑의 영속성을 묘사한 작품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다음 쪽에 나오는 아리 셰퍼의 다른 그림은, 이 둘의 불쌍한 사연을 듣고 슬퍼서 기절한 단테를 묘사한다. 신의 섭리는 그들을 지옥에 가두었으나, 단테는 그 까닭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들의 사랑은 참으로 달콤하고 정열적인데, 그런 사람들이 이런 고통스러운 곳에 빠져야 하다니요." (50쪽)
이토록 정열적인 사랑을 예술가들이 지나칠 리 없지 않은가. 책에는 아리 셰퍼가 그린 두 점의 그림은 물론, 귀스타브 도레, 윌리엄 다이스의 그림과 로댕의 조각 작품까지 나온다.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앵그르, 들라크루아,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를 포함해서 열 명도 넘는 화가가 이들의 사연을 그렸다. 과연 이들 그림의 주제가 '지옥'이나 '형벌'일까? 신의 눈과 사람의 눈은 다른 것을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쨌든, 단테도, 화가들도, 그리고 이 책을 보는 우리들도 사람이다.
단테의 <신곡>은 고전이다. 하지만 마크 트웨인이 말하듯, 고전은 누구나 칭찬하지만 읽지는 않는 책일 수도 있다. 학생 시절 한 번 읽었던 <신곡>이지만, 명화와 함께 감상하는 느낌은 많이 달랐다.
고전은 시간을 초월하기 때문에 고전이다. 시간을 초월한다는 말은 역사적 맥락을 벗어나도 위대하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곡>은 종교적 맥락이나 르네상스라는 시대적 배경을 초월한다. 그래서 <신곡>은 신에 관한 작품이 아니라 인간에 관한 작품이다. 르네상스라는 것 역시 그런 새로운 시대의 흐름이었다.
단테라고 하면 맨 처음 무엇이 떠오르는가? 나는 베아트리체가 떠오른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의 작품, <베아트리체>를 보라. 누군가는 이 그림이 신성을 표현했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신성이란 뭘까? 인간이라는 존재가 염원하고 갈구하지만, 이 세상에서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한 무엇, 그걸 신성이라 부르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단테는 <신곡>으로 신성을 표현했다. 그리고 그 신성은 지옥과 연옥, 그리고 천국을 통해서가 아니라, 베아트리체라는 한 영혼의 모습을 통해서 표현되었다. 그리고 그 영혼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증정받아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