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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Dec 29. 2018

기억한다는 것,
그건 때로 놓아줌을 의미한다

[잡식성 책사냥꾼] 미셸 쿠에바스, <블랙홀 돌보기>


미셸 쿠에바스의 어린이 소설, <블랙홀 돌보기>는 12세 소녀 스텔라 로드리게스가 NASA 건물 문지기와 대화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자신은 미래에서 온 사람이니 칼 세이건 박사를 만나야 한다고, 실랑이를 벌인다. 종종 있는 일인지, 문지기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는 듯하다. 아빠가 근무하던 곳에 들어가 보려는 것이지만, 먹히지 않는다. 집에 돌아온다.


비 오는 날. 길가 쓰레기통 옆에 놓인 종이 상자 속으로 뭔가가 휙 들어간다. 스텔라는 성에가 낀 유리창을 손으로 문지르고 쳐다본다. 상자 안에서 작고 까만 뭔가가 떨고 있다. 강아지나 고양이? 아니다. 팔도 다리도 없고, 눈만 뎅그런 검은색 물체다. 블랙홀이란다.






내 애완동물은 블랙홀


블랙홀은 거대한 별이 죽어서 그 별 속으로 붕괴가 일어날 때 생겨납니다. 질량과 중력의 관계 때문에 엄청나게 큰 끌어당기는 힘이 생겨납니다. 사실상 아무것도 블랙홀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빛조차도 블랙홀 안에 갇혀 버리지요. 만나는 것마다 모두 삼켜 버리는 중력의 깜깜한 중심이 블랙홀인 것입니다. (17쪽)


집에 있는 천문학 책을 보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다. 스텔라가 보기에, 이 블랙홀은 쓰다듬어 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만지기라도 했다면....


어쨌든, 애완동물로 키우기로 했으니 이름을 지어줘야 한다. 스텔라는 잠깐 생각하다가, '래리'라는 이름을 붙인다. 블랙홀은 특이점, 그래서 '싱귤래리티'에서 두 글자를 따 왔다.


블랙홀은 주인공 스텔라의 집안, 그리고 마을 여기저기에서 무언가를 계속해서 먹어치운다. 잔디 깎는 기계가 없어지기도 하고, 정원에 세워둔 석상이 없어져서 난리가 나기도 한다. 스텔라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블랙홀은 햄스터를 삼켜버렸다. 


원래 교실에서 키우던 그 햄스터의 이름은 스튜. 냄새가 너무 심해서 반 아이들이 모두 달려들어 냄새를 없애려고 여러 가지를 시도했다. 하지만 목욕도, 털 다듬기도, 향수도 소용없었다. 하마 트림이 손에 묻은 냄새가 난다고. 방학 동안, 스튜를 돌보는 것이 스텔라의 임무였는데, 잠깐 눈을 뗀 사이 스튜는 정말로 블랙홀의 한끼 식사가 되었다.


스텔라는 시내로 달려 나가 햄스터를 한 마리 사 온다. 그리고 부엌에서 가장 냄새나는 치즈를 가져와 햄스터에게 문지른다. 그런데 동생 코즈모가 지나가다가 그 광경을 본다.


"누나 뭐 해?"

"보면 몰라? 햄스터 냄새나게 만들고 있잖아!" (29쪽)


스텔라는 햄스터를 훈련 시킨다. 바닥에 가만히 앉는 데까지 성공한 둘. 스텔라는 잘했다고 래리를 쓰다듬으려 한다. 래리도 눈을 감더니 마치 고양이처럼, 가르릉 하는 소리라도 낼 것처럼, 스텔라의 손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래리가 블랙홀이라는 사실을 문득 기억하고 손을 거둬들이는 스텔라. 래리는 왠지 슬퍼 보인다. 그리고 스텔라는 깨닫는다. 래리는 햄스터를 잡아먹으려던 게 아니었다. 래리는 햄스터를 안아보고 싶었던 것뿐이다.



아빠의 기억


스텔라는 옷 만들기를 좋아하는 이모가 선물하는 스웨터가 싫다. 그래서 옷장에 있는 스웨터를 모두 래리에게 먹인다. 이모가 준 스웨터를 입지 않아도 되니 스텔라는 기분이 좋아진다. 더 행복해지고 싶은 스텔라. 아빠의 추억이 담긴 물건을 하나둘 래리에게 먹인다.


돌멩이 세척 기계를

헤드램프를

화학 실험 세트를

비커 몇 개를

원소 주기율표를

채집한 곤충을

뇌 모형을

천문학자에 관한 책을

아빠의 빨간 모자를

스텔라리움 행성을 (67쪽)


이제 스텔라에게는 가장 소중한 하나의 물건이 남았다. 아빠와 주고받던 농담이 녹음된 테이프와 녹음기다. 과학 덕후 부녀가 주고받는 시시껄렁한 농담, 그리고 아빠의 웃음소리.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아, 새로 산 신발 안에 녹음기를 숨겨서 래리에게 먹이는 스텔라. 이제 기분이 달라진 걸까?


거울을 보니, 아빠와 실험을 하다가 다친 턱의 흉터가 사라졌다. 스텔라를 풍뎅이라고 부르던 엄마가 이름으로 부른다. 사진 속의 아빠가 쓰고 있던 모자가 사라졌다.



블랙홀 탐험기



아빠의 추억을 없애버리고, 이제 보통의 가정이 될 수 있을까? 그런데 엄마가 데려온 강아지를 래리가 삼켜버렸다. 던진 공을 쫓아가던 강아지가 공을 쫓아 블랙홀 안으로 달려들어간 거다. 안절부절못하는 스텔라를 보고 래리도 걱정인가 보다. 좋은 생각이 난 듯, 래리는 꽃밭으로 가서 꽃향기를 맡는다. 재채기를 하려는 래리. 하지만 되지 않는다.


래리는 그만두지 않고 계속 꽃향기를 맡았고, 어느 순간 에... 에에... 하면서 몸을 젖혔어. 하지만 결코 '취'가 나오지 않았지. 아아, 나의 블랙홀은 '에취' 하고 재채기를 해서 개를 뱉어 내고 싶었던 거야. (86쪽)


이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스텔라. 침대보 밧줄을 발목에 묶고, 다른 한쪽은 집안에서 가장 무거운 물건이라고 생각되는 욕조 다리에 묶은 뒤, 스텔라는 블랙홀 안으로 점프한다.


어둠 속에서 방황하던 스텔라는 동생의 목소리를 듣는다. 동생이 욕조째로 빨려 들어온 것이다. 입기 싫어 블랙홀로 던져 넣은 스웨터를 입고, 먹기 싫어 던져 넣은 방울 양배추를 먹으면서, 동생과 스텔라는 아직 이름도 지어주지 못한 개를 찾아 나선다. 욕조를 타고 블랙홀 안을 항해하는 것이다.



기억한다는 것


결국, 블랙홀 안에서 다시 아빠와 만난 스텔라.


"보고 싶어. 예전처럼 아빠와 이야기할 수 없어서 슬퍼."

"아빠하고 언제든지 이야기할 수 있어. 무슨 이야기든."

"아니잖아."

"왜 아니야?"

"왜긴, 아빠가 없으니까 그렇지."

"내가 없다고? 음.... 눈에 보이기론 그렇지. 그렇지만 아빠가 지금 여기에 있잖아. 어떻게 그럴까? 어떻게 아빠가 네 블랙홀 속에 있을 수 있을까? 이건 물리적인 내가 아니야. 거기에 살고 있는 나지."

아빠가 손가락으로 내 심장을 가리켰어. 그 순간 난 마치 심장이 무너지거나 터져 버릴 것 같았어. (179-180쪽)


별이 죽어도 그 빛은 우리에게 보이듯, 그렇게 아빠는 스텔라에게 별자리 같은 길잡이가 되겠다고 약속한다. 그리고 둘은 껴안는다. 스텔라는 아빠의 모든 것을 기억하려고 애쓴다. 그때, 갑자기 테이프가 웅 하고 감기는 소리, 그리고 탁 소리가 난다.


아빠가 허리를 펴고 앉았어. 그리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어.

"자 이거 재미있는 거야. 10에 3을 더하면 1이 되는 곳은 어디게?"

이건 녹음기 속 말. 녹음기가 처음으로 돌아가 재생되기 시작한 거야. (181쪽)


스텔라는 깨닫는다. 눌러야 하는 것은 '재생' 버튼이 아니라, '멈춤' 버튼이라는 걸.


'멈춤' 버튼을 누르고 블랙홀에서 나와 자기 방으로 귀환한 스텔라. 스텔라와 동생은 엄마의 모습을 보고 달려든다.


"엄마!"

갑작스레 달려들어 껴안는 우리 힘이 너무 세서 엄마는 거의 넘어질 뻔 했어.

"풍뎅이, 코즈모, 너희 무슨 일이 있어서 엄말 이렇게 꼭 안아 주는 거야?"

"그냥 엄마가 너무 너무 너무 보고 싶었어." (186쪽)


스텔라는 래리를 우주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헤어지기 전에, 래리와 껴안는다.


래리의 눈이 커다래졌어. 날 정말 안아 주는 거야? 긴 시간 끝에 마침내 누군가의 품에 안기는 거야?

"괜찮아. 난 사라지지 않을께."

난 말했어. 우린 둘 다 눈을 감았어.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이 세상의 모든 멋지고 가슴 아픈 것들을 껴안고 있는 기분이 들었어. 막 꺾은 민들레 향기, 부엌에서 요리하는 엄마, 내 손에 쥐어진 코즈모의 조그만 손, 기억들, 별자리, 행성들, 그리고 휙휙 지나가는 시간, 느리게 지나가는 시간, 그리고 그 사이의 모든 것들. 이건 진짜인데, 래리 둘레에 내 팔을 두르고 서 있는 그때 난 멀리서 희미한 웃음소리를 들었어. 아빠 웃음소리. (194쪽)


은하의 중심에 있는 블랙홀. 한가운데 구멍이 있어도 괜찮다고, 그 안에 아름다운 것들이 가득하니까 괜찮다고 말하면서 스텔라는 래리를 보낸다. 삶에는 구멍도 있다. 하지만 그것 또한 나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작은 까망이 친구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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