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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모두 상자에 갇혀 산다

[책을 읽고] 토니 포터, <맨박스>

by 히말

<맨박스>라는 책이 있었다. 남자들이 갇혀 지내는 상자, 즉 맨박스에서 나와야 한다는 내용의 페미니스트 선언서였다. 저자는 남자였고, 서문에서부터 그 사실을 어필하는 책이었다. 저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책에 적고 있다. 어떻게 남자들이 여자들에 대한 성폭력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공유하고 서로에게 강요하는지를 이야기하기 위해 꼭 필요한 몇 개의 에피소드가 그의 삶으로부터 공유되어 있었다.


책 자체는 정말 못 썼다. 성차별이라는 분명한 생활의 사실을 그렇게 일관적으로 추상적으로만 이야기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재주다. 그래서 몇몇 괜찮은 논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설득력이 거의 없다. 억지 비유일 수도 있겠지만, 칸트의 정언 명령 같다고나 할까? 성차별은 나쁜 것이니까 그만둬야 한다고 무한 반복하는 책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페미니즘 강의로 먹고 사는 저자의 직업을 고려하면, 실생활과 연결되는 에피소드나 사례가 많이 나와야 하는데, 그런 것이 거의 없다.


각설하고, 내가 놀란 것은 마지막 페이지, 아니 책 뒷표지를 덮을 때였다. 저자의 사진이 있었던 것이다. 흑인이었다.


도대체 왜 눈치 채지 못했을까? 저자는 자신이 어릴 적 뉴욕시 할렘에 살았다고 말했는데도, 나는 그가 할렘에 사는 가난한 백인일 것이라고 단정을 하며 책을 읽었다. 직전에 읽었던 <가난 사파리>의 저자와 어린 시절 묘사가 흡사해서 그런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흑인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나 자신조차도 아주 견고한 선입견의 상자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책 자체는 훌륭하지 않았지만, 책을 읽는 경험으로부터 이런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책은 어떻게든 우리에게 뭔가를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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