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미겔 데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이건 현대소설인가
그렇다. 보르헤스가 인류 최고의 명작이라고 칭했던 바로 그 돈키호테다. 초반 1/3 정도는 빠른 전개와 해학, 시대를 초월하는 명언과 통찰로 경탄을 금할 수 없는 전개를 보여준다. 게다가 <돈키호테>의 원고는 다른 사람의 것이며, 제일 흥미로운 부분에서 원고가 끝나고, 원고의 다음 부분을 시장에서 발견했는데 그게 또 아랍어 버전이고, 우연히 만난 무어인에게 번역을 의뢰하고, 그 무어인은 건포도 약간만을 보수로 받고 기꺼이 번역해주는 등, 포스트모더니즘이라 해도 좋을 정도의 서사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 보르헤스가 감탄할 만하다. (건포도를 20kg 가까이 받았으니 아주 싼 보수는 아닐 수도 있다.)
계급과 성별에 따른 차별이 존재하고, 피부색과 종교가 다른 자들에 대한 증오가 권장되는 사회에서, 이 책은 사회적 맥락을 벗어나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들 중 하나는 마르셀라의 이야기다. 한 청년이 그녀를 사모해 상사병으로 죽었는데, 사람들이 그 청년을 추도하는 장례식 자리에 그녀가 나타난다. 그리고 말한다.
"제가 약속도 하지 않았고 속이지도 않았고 부르지도 않았으며 받아들이지도 않은 사람에게서 잔인하다느니 살인자라느니 하는 말을 듣고 싶지는 않습니다." (228쪽)
여자에게 정조를 요구하면서도, 남자의 구애를 뿌리치면 매정하다느니 살인자라느니 하고 손가락질하는 세태를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다행히도, 마르셀라는 막대한 유산을 받았기에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었다. 그 자유를, 그녀는 목동이 되는 것으로 향유했다. 아름답다는 여자들이 부지기수로 나오는 이 책에서, 내게는 마르셀라가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
이발사가 비를 피하려 머리에 쓴 대야를 황금투구라고 착각하고, 객줏집 주인에게 기사 서품을 받는 돈키호테지만, 가끔은 현인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 또한 세르반테스라는 작가가 시대를 초월하기에 가능한 것이라 생각한다.
"앞으로 우리 서로 좀 더 존경심을 갖고 대하며, 함부로 놀리거나 하는 일은 없도록 하세." (347쪽)
이 말은 돈키호테가 산초에게 하는 말이다. 싸워야 할 상대가 격이 낮으니 종자가 대신 싸워야 한다며 산초의 등을 떠밀다가, 기사들의 식습관에 대해서는 책에 씌여있지 않으니 산초가 가진 음식이라도 나눠먹겠다고 하는 식으로 이중적이고 비일관적인 행태를 보이는 돈키호테가 하는 말이라기에는 다소 생뚱맞아 보이기까지 한다. 풍차를 거인으로 착각하고 덤볐던 돈키호테가 밤새 정체불명의 괴물이라고 생각하며 무서워했던 빨랫방망이는 빨랫방망이로 제대로 보는 것도 신기하지만, 그런 주인을 놀리며 웃는 산초에게 몽둥이 세례 대신 점잖은 말로 타이르는 돈키호테도 대단하지 않은가.
그러나 아쉬운 중후반
그러나 중반 이후 액자 형태가 나오면서 뻔한 캐릭터, 뻔한 전개, 지겨운 중언부언, 분량 늘리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안셀모와 로타리오의 이야기다. 이야기 자체는 뻔하기 그지 없는데, 분량은 아주 압도적이다. 특히, 뻔한 전개로 들어가기 전에 두 친구가 마치 로마인들이 하듯 변론 싸움을 하는 장면을 보면 '쓸데 없는 대화로 분량늘리기'라는 요즘 소설가들의 기술도 그 원류가 세르반테스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입 한번 열면 열 페이지가 넘어가는 장광설을 늘어놓는 상대의 말을 들으며 졸지 않는 두 친구들도 참 대단하다.
더 심한 것은 돈 페르난도 4인방 이야기다. 두 명의 여자와 두 명의 남자에 관한 이야기인데, 누구나 예상하듯이 그냥 짝지어주기로 끝난다. 어쩌면 양산형 로맨틱 코메디도 세르반테스가 원류 아닌가 싶지만, <한여름 밤의 꿈>을 비롯한 셰익스피어의 커플링 로맨스들이 <돈키호테>보다 더 먼저 쓰여졌고, 비슷한 유행은 이미 그 전부터 존재했을 것이다.
결국은, 잊지 못할 캐릭터들
책을 읽고 나서 가장 인상깊게 남는 것은 결국 캐릭터들이다.
"편력 기사는 어떤 객줏집에서 자든 숙박비는 물론이고 그 외 어떤 비용도 지불하지 않소. 기사도의 법칙과 권리를 보면, 기사들은 견디기 어려운 고행을 하는 대가로 어떠한 환대도 받을 수 있게 되어 있소." (288쪽)
서사의 주인공이라는 위치 때문에, 돈키호테는 종종 세르반테스의 대변인 역할을 해야 하지만, 돈키호테가 가장 빛나는 순간들은 그가 돈키호테라는 캐릭터로서 살아 움직일 때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발사에게서 황금투구를 빼앗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데, 그것이 몇 안 되는 돈키호테의 승리의 순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 이발사에게 돈키호테와 산초는 그냥 2인조 날강도에 불과할 뿐이지만 말이다.
산초 역시 생동감에 있어서는 단연 굴지의 캐릭터다. 더구나 이런 캐릭터들은 요즘의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감초 역할로 필수화되어 있다는 걸 생각하면, 세르반테스의 대단함이 더욱 돋보인다. 모험을 끝내고 마을로 돌아온 산초가 아내에게 하는 말을 들어보자.
"어떤 때는 내가 담요로 헹가래를 쳐지기도 했고 또 어떤 때는 죽도록 맞기도 했지. 하지만 이 모든 일이 있더라도 산을 넘고 숲을 뒤지고 바위를 밟고 성을 방문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돈 한 푼 지불하지 않은 채 객줏집에 묵으면서 모험을 기다리는 것은 멋진 일이야." (974쪽)
과연 그 주인에 그 종자 답다. 돈키호테는 광기에 빠져 무전취식(+취침)을 자신의 권리로 알았지만, 산초는 그게 어림도 없는 불법행위라는 걸 알면서 즐긴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산초가 악당이라는 말은 아니다. 돈키호테보다 더 불쌍한 운명을 거듭 마주하는 산초에게 어찌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은 아니지만, 로시난테 역시 가장 훌륭하게 만들어진 캐릭터의 하나다. 로시난테는 다른 말에게 수작을 걸다가 혼나기도 하며, 돈키호테가 속임수에 빠져 위험해졌을 때는 (알고서 그런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주인을 돕기 위해 미동도 하지 않는 등 감초 이상의 활약을 한다. 책 말미에는 주요 등장인물들의 묘비가 소개되는데, 돈키호테나 산초, 둘시네아에게 일반적인 14줄 짜리 소네트가 헌정되어 있는 반면, 로시난테에게는 3줄이 보너스로 붙은 17줄 짜리 소네트가 헌정되어 있다.
그의 영광 결코 잊히지 않으니,
그의 늠름함으로 로시난테까지도
브리야도르와 바야르도를 능가하는도다. (980쪽)
'살찐 얼굴'의 둘시네아나 '거의 백작이 될 뻔한' 산초에 비하면 좀 밋밋한 헌정시이지만, 전설의 명마들과 견주어 더 낫다는 평을 들은 로시난테는 나름 흡족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