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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Jun 01. 2022

요즘 읽은 소설들

<한순간에>, 그리고 <사일런트 페이션트>


사는 게 힘겨워 소설을 많이 읽게 되었다. 처음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가난한 사람들>과 <지하생활자의 수기> 같은 고전 소설을 읽었는데, 안토니오 가리도의 <시체를 읽는 남자>가 워낙 괜찮아서 현대소설들을 읽기 시작했다.

<시체를 읽는 남자>는 세계최초의 법의학자로 알려진 송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이다. 송나라 사람에 관한 소설을 현대 스페인 사람이 쓴 것이지만, 저자 후기에도 나오듯이 그야말로 이잡듯이 문헌 조사를 해서 쓴 역작이다. 송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가 그야말로 생생하게 펼쳐진다. 플롯은 조금 과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주인공에게 시련이 집중된다. 그래서 뒤로 갈수록 긴장감이 오히려 떨어진다.


다음으로 읽은 것이 조정래의 <태백산맥>. 무려 열 권 짜리다. 방대한 스케일의 대서사 안에 녹아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접하며 마음이 숙연해진다. 작가가 해야 했을 방대한 조사 작업을 생각하면 경외심이 생긴다. 한 가지 흠이라면 작가의 필력이다. 그러나 이 문제점은 널리 알려진 것이고, 필력을 상쇄하고 남는 거대한 서사가 있으므로 <태백산맥>을 읽는 선택에 절대 후회는 없을 것이다.

수잰 레드펀의 <한순간에>가 요즘 읽은 소설들 중에 단연 최고였다. 죽은 화자의 서술이라는 이제는 다소 식상한 수법도, 이따금 등장하는 사후 인식에 관한 설명이 적절해서 꽤 괜찮은 효과를 낸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소설의 최강점은 단연 감동에 있다. 극한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성의 어두운 면을 다룬 소설이지만, 그 극한 상황은 동시에 인간의 가장 고귀한 면도 드러낸다. 카일과 어머니가 춤 추는 마지막 장면은 보기 드물게 빼어난 엔딩이다. 별 다섯 개.


- 내가 살아 있을 때는, 한 번도 우리 가족을 제대로 살펴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세계에 살면서 서로의 주변에 존재했을 뿐이다... 이제는 열심히 그리고 충분히 오래 보기만 하면 다 볼 수 있다. (411쪽)


- 카일의 손도 맨손이고 엄마의 손 역시 그렇다. 앞으로 손을 내미는 엄마의 손가락이 떨린다. 그의 손이 엄마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우는 순간, 나는 마침내 마지막 인연의 가닥이 녹아 버리는 것을 느낀다. (507-508쪽)

알렉스 마이클리디스의 <사일런트 페이션트>도 아주 괜찮았다. 테오와 앨리샤의 이야기가 잘 짜인 융단처럼 매끄럽게 아귀를 맞추고 있다. 거기에 그리스 비극 <알케스티스>가 정교하게 버무려져 있다. 종장에 드러나는 반전은 조금의 억지스러움도 없이 아주 매끄럽게 엮여 있다. 복선도 결말부에서 말끔하게 회수한다. 읽고 나서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것도 대개의 반전 소설에서는 절대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역시 별 다섯 개. (결국 또 한 번 읽었다. 처음 읽을 때보다 더 좋았다.)


- 캐시는 내 인생 하나뿐인 사랑이었고, 내 인생 자체였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아직은. 그녀가 나를 배신했다고 해도 나는 아직 그녀를 사랑했다. (179쪽)


넬레 노이하우스의 소설 두 권을 읽었다.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은 임팩트 있는 첫 장면부터 독자를 몰입시키는 힘이 있다. 다만, 사건의 진상이 너무 배배 꼰 느낌이라서 극 후반에 긴장감이 떨어진다. 초반부에 분명히 주인공 급으로 제시되었던 인물이 버려지는 것도 개인적으로는 좀 아쉬웠다.


두 번째로 읽은 <사랑받지 못한 여자>는 졸작이었다. 데뷔작의 장점, 즉 임팩트 있는 도입부와 개성 넘치는 캐릭터라는 요소가 모조리 사라졌다. 반면 배배 꼬인 억지 전개와 후반부의 기나긴 설명조는 그대로다. 전작에서 파탄에 이른 캐릭터들의 옛 모습이라도 제대로 나왔으면 그 캐릭들의 팬들에게 작은 만족감이라도 줬을 텐데 그렇게 하지도 못했다. 피아와 보덴슈타인을 어떻게든 띄워보려 했지만, 결과는 처참하다.


최악은 데이비드 발다치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였다. 이 소설은 책속에 나오는 한 줄로 요약된다.


- 이게 네가 꾸민 복수극이라고? 글쎄, 난 납득이 안 되는걸. (692쪽)


한마디로 조금도 납득이 안되는 이야기다. 지루하기 짝이 없음에도 좋은 결말을 기대하고 참았더니 그 기대를 완전히 뭉개주었다. 주인공을 비롯한 캐릭터들의 만듦새도 처참하다. 이렇게 형편없는 소설은 몇 년만이다. 얼토당토 않는 억지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속편을 쓰겠다고 팀을 만드는 꼴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났다.

지금 레이먼드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을 읽고 있다. 필립 말로라는 상당히 특이한 매력을 가진 주인공이 등장한다. 현재 소설 중반부를 지나고 있는데, 지금까지는 추리 소설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아주 독특한 전개다. 서사의 주인공이 탐정 자신이다. 여하튼 필립 말로라는 캐릭터는 매우 잘 만들어진 느낌이다. 1950년대 미국의 모습을 훔쳐보는 재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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