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사의 출가>과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붓다가 깨닫고 나서 처음 다섯 제자와 함께 정진할 때였다. 야사라는 귀족 젊은이가 그곳을 지나갔다. 그는 집에 가서 평소 하는 대로 진탕 마시고 놀았는데, 아침에 보니 술에 취해 자고 있는 무희들의 모습이 마치 시체들과 같다는 생각을 하고 부처님께 귀의하고 깨달았다.
다섯 비구는 붓다가 깨달음을 얻기 전에도 오랫동안 같이 고행하던 수행자들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놀다 온 젊은이가 갑자기 깨닫는다? 이건 좀 너무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걸 설명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첫째, 젊은이가 그 전에 수많은 윤회를 거치면서 아라한 렙업 직전까지 수행을 쌓았다는 관점, 즉 경험치가 만렙 직전이었다는 것이다. 법륜 스님에 따르면 '종교로서의 불교'의 관점이다. 다시 말해 상당히 힌두교적인 설명이다.
둘째, 강렬한 경험으로 깨달았다는 관점. 법륜 스님의 설명이다. 뭐 곱셈을 생각하면 당연한 이치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납득하고 싶지 않다. 이 설명에 의하면, 야사는 무희들을 불러 밤새 퍼마실 정도로 돈이 많아 극과 극의 경험을 할 수 있어 초단기 코스로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오래 전,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 난 이 구도를 처음 보았다. 오랫동안 정진한 자보다 제멋대로 세상을 경험한 자가 먼저 깨닫는다는 해괴한 이야기. 나르치스는 이 소설의 초반부와 결말부에서만 등장할 뿐, 책의 대부분은 골드문트가 세상을 돌아다니며 향락과 난교를 즐기는 내용이다. 성적으로 문란해야 깨닫는다는 건가? 그냥 헤세라는 사람이 개인적 소망을 소설로 쓴 건가? (<아우구스투스>라는 단편을 포함해 헤세의 많은 작품에서 그런 성향이 드러난다.)
우리는 단 한 번 산다. 그 삶에서 이런저런 좋은 것들을 모조리 누리고 싶다. 깨달음마저도 갖고 싶다. 깨달음 이후에 난교 파티를 할 수는 없으니 일단 난교 파티를 포함한 세상의 쾌락을 모조리 즐긴 후에 야사처럼 초고속으로 깨달으면 장땡이라는 마인드인 것이다. 너무 인간적이다.
p.s.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읽은 것은 아주 오래 전이고, 단 한 번 읽었으므로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수정이 필요한 부분은 댓글 달아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