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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소설

[초단편] 나는 내 직장이 좋다

by 히말

내가 갖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라.

우울증 상담 중 그런 조언을 들었다.


누군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내 집이 좋다.

내 집이라서 좋다.


그저 내 직장이라서 좋다, 라고 따라쟁이처럼 말해도 좋을지 모른다.

그런데 조금 생각해보니, 내 직장은 정말 좋은 점이 많다.

그래서 생각나는 대로 한번 죽 적어보려고 한다.



1.


아침에 나는 셔틀을 타고 출근한다.

아주 좋은 직원 복지라고 생각한다.

턱수염이 땅에 닿을 것처럼 호탕하게 웃으며 좋은 아침이라 외치는 드라이버의 상큼한 아침 인사가 좋다.


"잘 잡으셨죠? 출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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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잡이를 놓치면 추락할 수도 있다.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사고다.

사실 며칠 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

아침부터 피곤했는지, 손잡이를 놓친 젊은이가 가오리 등 위를 죽 미끄러지더니 허공으로 날아갔다.


"otativel!"


내 옆자리에 앉은 마법사가 손잡이를 잡은 채 한손만으로 완드를 흔들며 외쳤다.

전공 분야가 동역학인가 보다.

일이 생겼음을 알아챈 드라이버가 가오리를 뒤로 돌렸다.

마법의 힘으로 천천히 낙하하는 승객을 가오리는 가볍게 받아냈다.

박수가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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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금 이른 시각에 직장에 도착한다.

사무실 내 자리로 가기 전에, 나는 안뜰을 산책하고는 한다.

아침 햇살과 시원한 공기를 느끼며 산책을 할 수 있는 안뜰이 있다는 게 참 좋다.

안뜰 가운데에는 연못이 있다.

겨울 아침, 연못 물이 얼어 있으면 물고기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안녕, 데이브! 안녕, 시오리!"

좋아하는 로맨스 소설의 두 주인공 이름을 붙인 물고기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가끔은 아침 식탁에서 덜어낸 빵 부스러기를 뿌려주기도 한다.

운이 좋은 날엔, 시오리가 가볍게 날아 올라 공기 중에 무지개를 뿌리고 간다.


"어허! S218에게 아무거나 먹이지 말라고!"

이따금 옆 사무실 헨케가 장난 삼아 말을 걸고는 한다.

"너무 살쪄서 날지 못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마력 딸린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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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근무 시작이 가까워지면, 컵을 들고 2층으로 걸어간다.

니코열매 차를 받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 있다.

예전에는 니코열매 가루를 물과 함께 끓인 다음 여과해 마셨는데, 요즘엔 다르다.

스프레소라는 이름의 마법사가 개발한 가압증기추출 방식으로 뽑는다.

미세한 구멍이 뚫린 도가니에 니코열매 가루를 넣고, 마법사가 뜨거운 물을 고압으로 쏴 넣으면 반대방향으로 차가 추출되어 떨어진다.

마력이 조금 더 들지만 맛이 아주 좋다.


이렇게 신선한 니코열매 차를 매일 마실 수 있다는 것도 내 직장의 좋은 점이다.

주전자를 들고 돌아다니는 상인들에게 사려면 몇 푼이라도 돈이 드는데다, 가압증기추출 방식이 아니라서 맛도 덜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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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내망에 가끔 마법 스터디 공지가 뜨고는 한다.

나는 전공이 '배분'이고, 부전공이 '정보추출'이라 다른 분야는 잘 모른다.

그래서 기초적인 내용이라 해도 다른 분야의 마법을 살짝 배워보는 것은 매우 즐겁다.

내 직장에서는 이런 스터디 시간을 업무 시간으로 인정해준다.

이것 또한 내 직장의 좋은 점 중 하나다.


멀리서 유학하는 딸네미 학비 때문에 허리띠 꽉 졸라야 하는 싱글대디다.

요즘 뜬다는 '무작위 조합'이나 '3차원 패턴 분석'이 아무리 흥미로워 보여도, 내 돈 내고 배워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실제로 업무에 도움이 안 되더라도, 지적인 호기심을 공짜로 채워주는 직장 복지가 고마울 따름이다.


사내 도서관에는 매달 신간이 몇 권이라도 들어오고,

원하는 직원들에게는 이야기 보따리 서비스 구독료도 지원해준다.

딸네미도 없는 텅빈 집에 들어서면, 사람 목소리가 그리운 나는 우선 이야기 보따리부터 풀어 놓는다.

보따리가 들려주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청소도 빨래도 설거지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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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메뉴 가성비가 좋은 구내 식당도 좋은 점 중 하나다.

물가가 올라 청어 덮밥 한 그릇도 6탈러는 든다.

구내 식당에서는 반찬이 서나 가지 올라오는 메뉴가 4탈러니 감사할 따름이다.


월급은 오르지 않는데 무섭게 오르는 물가가 두려워진다.

마스코 공국이 카이후 공국을 침략한 지 6개월이 지났다.

마스코 공국이 '묵시록' 마법을 준비하고 있다는 믿을 수 없는 소식도 들려온다.

설마 싶지만, 마스코 공작이 치매에 걸렸다는 소문도 있으니 마냥 안심하고 있을 수도 없다.


전쟁도 문제지만, 물가가 오르는 이유는 또 있다.

작년 초 시작된 마나 기근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가만히 있어도 마력이 빠져나간다.

사람들 기력이 딸리고, 건강이 나빠지는 것은 물론이고,

그냥 흩어져버리는 마나를 보충하느라 국가 차원에서 마나를 보충해야 한다.


사람들이 쓸 마나는 부족하기만 한데, 전체적으로는 마나 인플레가 일어나는 것이다.

마나를 탈러로 전환하는 '전환' 전공 마법사의 주가가 하늘을 찌른다.

예전에는 따분하다고 외면 받던 전공인데 말이다.

'전환' 전공은 쿼터제가 실시되고 있어, 새로 라이선스를 딸 수도 없다.

이미 라이선스를가진 사람들만 신나는 세상이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옆자리 카스텔이 퇴근차 인사한다.

육아를 위한 유연한 근무 스케줄, 또 하나 내 직장의 장점이다.

우리 딸네미가 어렸을 적에 나도 덕 보았던, 아주 좋은 제도다.


두 시간 뒤에는 나도 셔틀 가오리를 타고 집에 간다.

역시, 내 직장엔 참 좋은 점이 많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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