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소설

[초단편] 일요일 아침

by 히말
liana-mikah--H0_Bh2esDg-unsplash.jpg


월리스 스티븐스가 나른함을 노래했던 일요일 아침이다.


그가 노래했던 키 웨스트는 어떤 곳일까? 까마귀를 쳐다보는 13가지 방법 따위를 시로 쓴 걸 보면, 그의 삶에는 나른함과 권태가 많이 있었나 보다. 어쩌면,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도 권태와 그리 다르지 않을지도.


극복할 수 있을까. 문 안으로 어머님이 들어오시는 걸 보고 처음 생각한 것은, 그 남자가 날 찾아내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구나 하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사라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나를 찾아내는 것이 그에게 과연 어려운 일이었을까? 어쩌면 일부러 찾지 않은 것이 아닐까?


내가 살았던 모든 순간이 나를 지나쳐갔다. 대학 시절 나를 사로잡았던 시인들, 그 시인들에 대한 감상을 공유했던 그녀,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깨져버린 한 순간.


나는 그 남자를 꽤 오랫동안 알고 지냈다. 선생님, 이라 부르며 그의 호의를 덥썩, 잘만 받아 먹었다.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었을까. 제3자의 눈에는 그토록 선명하게 보이는 뻔한 사실이, 왜 내게는 보이지 않았을까.


"그 사람, 네 아버지잖아? 콧날이며 눈매며 완전히 빼다 박은 것처럼 똑같던데."


오는 길에 특이하게 생긴 강아지를 마주쳤다고 말하는 것처럼, 지아는 새털처럼 가벼운 톤으로 내게 말했다. 내가 나의 '후원자'를 만나는 현장을 몰래 뒤따라왔던 것이다. 언제나 나를 즐겁게 했던 그녀의 호기심이 결국 도를 넘었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으면 그런 느낌일까. 조금 전까지 구름 하나 없이 파랬던 하늘이 노랗게 색이 바래지며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잠깐 동안 지아의 얼굴이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목이 탔다. 침을 삼켰다. 눈에 다시 초점이 잡히며 지아의 얼굴이 내 앞으로 떠올랐다.


"설마, 몰랐던 거야?"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저 사람, 네 아버지라고!"


나는 마른 침을 삼키고 나서야 대답을 할 수 있었다.


"네가 잘못 알았어.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적에 돌아가셨어."


그게 끝이었다. 다시는 지아와 만나지 않았다. 학교를 다닌다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집에 돌아와서, 그 남자가 정말 나의 생부인지 어머님께 물었다. 사실을 확인하고 나니, 결심이 굳어졌다. 내가 알던 세상과 결별해야 했다.


그 길로 자취방에 돌아와 짐을 쌌다. 실비아 플래스, 월리스 스티븐스, 에드워드 에슬린 커밍스, 테드 휴즈, 매거릿 애투드... 바로 그 전날까지 나의 삶을 지배하던 시인들의 시집을 모두 묶어 재활용품 수거함에 넣었다.


***


joshua-hoehne-vCdMCPZLZdE-unsplash.jpg


14년이다. 가명으로 사는 것은 정말 힘들었다. 앱카드나 간편결제는커녕, 신용카드조차 만들 수 없다. 언제나 현금을 들고 다녀야 했다. 월급을 현금으로 지급하는 직장이라 그나마 가능한 생활이었다.


"영문과?"

"네. 졸업은 하지 못했습니다."

"잘할 자신 있어?"

"열심히 하겠습니다."


불법은 아니어도 그렇게 떳떳하지는 않은 사업이라서 그런지, 사장은 그 정도 면접으로 나를 채용했다. 학력 인플레에도 불구하고, 대부업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개 고졸 이하의 학력이었다. 나도 고졸이었으나, 사장은 날 언제나 대학생! 이라고 느낌표를 붙여 불렀다. 1년 남짓 되자 사장은 날 관리 포지션으로 올렸다. 다른 직원들의 서류를 점검하고 계산이 제대로 되었는지 확인하는 데에 대학물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일을 시작할 당시만 하더라도 모든 직원이 실물 월급 봉투를 받았다. 그러나 5년쯤 지나자, 계좌 이체 대신 현금으로 월급을 받는 것은 나뿐이었다. 결국 사장이 물었다.


"사채야?"

"네?"

"여태까지 도망다녔다면, 웬만한 빚쟁이들은 다 포기했을 거야. 그렇지 않다면 사채업자겠지."

"아... 그렇습니다."


사장은 내가 사채업자들을 피해 도망다니며 살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는 한 마디로 나는 더 이상의 질문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 사장은 계속해서 내게 현금으로 월급을 주었고, 더는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나는 사장이 암호화폐와 관련된 모종의 돈세탁에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약점을 하나씩 잡은 채로 묵묵히 협력 관계를 이어갔다.


내게 행복 추구권 같은 것은 없었다. 내가 할 일은 그 남자가 내게 후원했던 대학 시절 학비와 생활비를 변제하는 것, 그리고 그저 살아가는 것뿐이었다. 10년에 걸쳐 그 남자의 후원금을 모두 변제하고 나자, 나는 어머님께 생활비를 부쳐드리기 시작했다. 누나가 어머님을 모시고 있겠지만, 생활비가 모자랄 것이 틀림없었다. 우리집은 한 번도 넉넉했던 적이 없었다. 그 남자의 후원이 아니었다면 나는 대학교에 갈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


sylvia_plath_collection_02.jpg


사랑은 아니었다. 사랑이라 이름 붙이면 내 마음의 한구석은 편하겠지만, 또다른 한 구석은 그 거짓말에 상처받을 것이 분명했다. 내게 사랑은 대학 시절에 끝나버렸다. 그것도 아주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날아온 돌멩이 하나로 무너졌다.


그녀와 결혼하고 나서야 내가 그동안 외로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에게는 부모님이 안 계셨다. 보육원을 나와 모진 세상의 날카로운 모서리를 혼자 겪어내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우리 사무실에 와서 돈을 한 번 꾸었고, 몇 달에 걸쳐 그 작은 금액을 갚았고, 다시 또 몇 달 뒤에 나타나 돈을 꾸었다. 어느 달, 납입을 잊은 그녀에게 독촉 전화를 걸었고, 그녀는 아이 때문에 집을 비울 수 없다고 했다. 그녀의 집을 찾아갔고, 아이와 함께 단 둘이서 세상의 멸시를 견디는 그녀의 삶을 봐야 했다.


"실비아 플래스를 좋아하시는군요."

"아, 죄송해요." 그녀는 책을 치우며 내게 말했다.

"저도 좋아하는 시인이라서요."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읽어요. 그냥, 왠지 좋은 것 같아서요."


사실, 나도 그랬다. 대학도 가지 못한 그녀가 어떤 계기로 그런 어려운 시인을 알게 되었는지는 물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왠지 알 것 같았다. 현실 도피였을 것이다. 실비아 플래스의 시에 담긴 어려운 단어들, 이해하기 힘든 표현들 사이에서 그녀는 나처럼 현실을 잊으려 했을 것이다.


신분을 위장하고 살아야 했던 나는 그녀의 법적인 배우자가 되어줄 수 없었다. 그저 그녀의 옆자리를 지켰다. 아이는 곧 나를 아빠라고 불렀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어쩌면, 내게도 행복이 허락될지 모르겠다는 막연한 희망이 서른을 막 넘긴 남자의 가슴을 부풀게 했다.


***


christopher-alvarenga-9uOxvJ-CWQw-unsplash.jpg


"이번 주말에 찾아 뵐께요. 오늘은 이만 돌아가세요. 아내도 함께 찾아뵐지는, 아내에게 물어본 다음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씀드리고, 어머님을 문밖으로 배웅했다. 골목 끝에 그 남자의 대형 세단이 세워져 있었다. 늦은 시간이고 먼 길이었지만, 어머님의 귀가는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골목 끝까지 걸어가시는 어머님의 발걸음이 눈에 밟혔다. 식탁 의자에 앉아 나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이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내가 몰랐을 리 없었다. 오히려 너무 늦게 일어났다. 그렇게 더 많이 주어진 시간이 나로 하여 내 처지를 잊게 했다. 감히 행복할 생각을 하다니.


야근을 마친 아내가 9시쯤 들어왔고, 학원을 끝낸 아들이 11시쯤 들어왔다. 아내의 얼굴이, 아들의 얼굴이 낯설게 보였다. 얼굴 윤곽이, 눈코입이 흐려져 보였다. 단지 심리적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난시가 심해지는 중이라는 말을 안경점에서 들었다.


토요일 아침, 우리 가족은 천변 공원에 나가 배달 음식으로 소풍을 즐겼다. 선불폰으로 어머님께 전화를 걸었다. 이번 주는 바빠서, 다음 주에 찾아뵙겠다고, 죄송하다고 말했다. 아내에게는 아직 말하지 못했다고도 말씀드렸다.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어차피 내 인생은 그랬다.


일요일 아침, 아내는 목욕탕에 가려고, 아들은 친구를 만나려고 외출했다. 잘 다녀오라고 하면서 나는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얼굴들이었다.


제도권 바깥에서 살아가는 내가 그들에게 남겨줄 것은 없었다.


문단속을 하고, 열쇠를 현관 옆 화분 밑에 넣어놓은 뒤, 나는 집을 나섰다. 버스를 타고 강가 근처 정류장에서 내렸다. 다리 중간까지 걸었다. 하늘을, 그리고 강물을 바라보았다. 더는 갈 데가 없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상상속의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