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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소설

[단편] 김의 공식 (2)

by 히말

밤새 청소는커녕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삼각김밥 두 개에 캔커피 하나까지 무전취식한 그 비홀더는 자고 있었다. 밤새도록 나에게 석화 광선을 쏘느라 마나가 다 떨어진 게 틀림없었다. 놈은 보고 있던 잡지 위에 엎어져서 자고 있었다. 그 잡지도 온전치는 못할 것이다.


놈이 무전취식한 음식값에, 그 잡지 값까지 포함해서 급료에서 제하더라도 놈은 아주 많이 남는 장사를 하고 있었다. 여섯 시간이 넘는 근무 시간 동안 잡지 보면서 킬킬거리기, 무전취식, 그리고 가끔 문밖으로 나가서 기지개 켜기 외에는 한 일이 없었다. 꿀을 빨아도 정도가 있지. 무슨 킬러 꿀벌이라도 되나.


아침 여섯 시 반에 생수 배달 트럭이 도착했다. 나는 일부러 큰 소리로 배달 직원에게 인사하고, 가게 문도 크게 열었다. 6월이었지만, 아침 공기는 제법 찼다. 놈은 꿈틀거리다가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는, 석화 광선을 쏠 대상, 그러니까 나를 찾아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스무 개 드려요?" 생수 팩을 내려놓으면서 배달 직원이 물었다.


"서른 개 주세요. 어제는 좀 많이 나갔네요." 나는 과장되게 쾌활한 목소리를 만들어 대답했다. 어제 생수가 몇 개 나갔는지는 모르겠고, 일단 저 비홀더가 과연 생수 옮기는 일은 할지 궁금해서, 평소보다 더 많은 물량을 주문했다.


"문 좀 닫지." 비홀더가 느릿하게 말했다. 파충류라서, 햇볕이 약한 아침에는 신진대사가 느린 모양이었다.


"저거 옮기셔야죠. 가게 앞 매대에 열 개 정도 쌓아주시고, 나머지는 창고로 옮겨주세요."


생수 배달 직원도 있고, 이른 아침부터 출근하는 사람들도 조금씩 보였으므로, 나는 용기를 내서 말했다. 두 시간 전이었으면 이렇게 긴 문장을 말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유통기한이 남아 있는 삼각김밥을 뜯어 입안에 넣고 우물거리면서 나를 쏘아보던 그 눈빛에, 다섯 시간 동안 쫄아있었던 것이다.


"에이~." 그렇게 투덜거리고 놈은 고개를 문 반대 방향으로 돌려 테이블 위로 누였다.


오늘부터 편의점 밤 근무를 시작했다는 사실을 망각했거나, 이 편의점을 자신의 새로운 사냥터로 확보했다는 자신감에서 나온 행동이었을 것이다.


"누구예요?" 생수 배달 직원이 조용히 물었다.


"새로 온 직원인데, 계속 자네요."


"아니, 짐을 같이 옮겨야지." 동정의 말만 남기고, 배달 직원은 작별 인사와 함께 트럭을 출발시켰다.


가게 앞 거리에도 왠지 사람이 없어 보였다. 목격자도 없이 비홀더와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투덜거리면서 생수 더미를 옮겼다. 열 팩을 더 주문한 치기가 후회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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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 날에도 놈은 한결같았다. 내가 별도로 메모를 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놈은 근무 시간 초장부터 두 가지 다른 맛의 삼각김밥을 꺼내 먹었다.


교대 시간에 포스기 정산을 해보면 맞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내 돈으로 메꿔 넣어야 하는데, 녀석이 무전취식한 것까지 내가 책임질 수는 없었다. 녀석이 먹은 것을 일단 내 돈으로 메꿔놓고, 나중에 사장에게 청구하기로 했다. 그래서 놈이 이것저것 무전 취식을 하는 모습을 몰래 찍었다.


새벽 두 시경, 한 무리의 대학생들이 발포주 몇 병과 과자 몇 봉지를 계산하는 동안, 험악하게 생긴 사내 둘이 가게로 들어왔다. 음료수를 한 개씩 들고 계산대로 온 그들은 직원 복장을 하고 라면 테이블에 앉아 노닥거리는 비홀더를 쏘아보았다.


놈은 마치 용수철 장치에서 튀어 오르기라도 하는 듯, 빠른 몸놀림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험악하게 생긴 두 사내의 음료수를 계산했다. 놈이 일을 하는 걸 처음 보는 순간이었다. 포스기를 다루는 걸 보니, 편의점에서 일을 해보긴 한 모양이었다.


새벽 세 시가 조금 넘었을 때, 한눈에 봐도 아주 많이 마신 취객이 가게로 들어왔다. 캔커피를 사서 라면 테이블에 앉은 그는 커피를 한모금 마시더니, 곧바로 바닥에 즉석 피자 한 판을 만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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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객의 옆의 옆 자리에 앉아 잡지를 보던 놈이 얼굴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아유, 빨리 치워야지. 문 옆이라서 손님들 들어오다가 밟고 넘어지겠네."


"어휴, 그래야겠네요. 부탁드려요."


"엥? 내가 치우라고? 그쪽이 치워야지." 놈은 2 더하기 2가 5라는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토사물의 시각, 후각적 효과 때문인지, 이번에는 나도 꽤 짜증이 난 상황이라 물러서지 않았다. 파충류든 비홀더든 토사물보다는 덜 무서웠다. "아니, 그걸 왜 내가 치워요? 카운터 제가 계속 보고 있잖아요? 잡무는 아저씨가 처리한다면서요?"


"아저씨?" 놈이 눈 네개로 동시에 광선을 쏘면서 언성을 높였다.


"그러니까, 형이 처리하셔야죠." 나는 재빨리 말을 고쳤다.


"아까 내가 카운터 도와줬잖아. 이건 좀 치워."


이쯤 되자, 나도 결국 뚜껑이 열렸다. "아니, 이틀 동안 겨우 사이다 두 개 계산하고 일을 도와줬다고요? 형, 여기 일하러 온 거 맞아요?"


"나도 내 할 일은 하잖아. 아까 그 조폭들, 네가 감당할 수 있었겠어?"


"아니 그 사람들이 왜 조폭이에요? 증거 있어요?"


"허허, 자기가 상대하지 않았다고 조폭을 조폭이 아니라고 하네. 누가 보더라도 조폭이잖아. 어깨에 문신 못 봤어?"


"못 봤어요."


"못 본 게 자랑이야? 암튼 내가 조폭 처리해줬으니, 토사물 정도는 처리해줘. 받는 게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지."


그 와중에도, 취객은 미안하다는 말을 모호하게 지껄이면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놈과 내가 말싸움을 하는 도중에 손님이 한 명 더 들어오려다 토사물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빨리 치워요. 전 카운터 봐야 해요." 내가 말했다.


"카운터는 내가 잠깐 봐줄 테니 좀 치워. 내가 이 나이에 토사물까지 치워야 해?"


"아니, 나이가 무슨 상관이에요. 형, 여기 알바 아니에요?"


"그래 맘대루 해라. 이따가 주인한테 말해야겠다. 토사물 안 치워서 손님들이 다 도망갔다고."


"사장님 오면 할 말 많아요, 저도."


결국 그러는 사이에 다른 손님이 가게 문을 열고 말했다. 이게 뭐냐고, 좀 치우라고. 놈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고 방으로 들어갔고, 뻘쭘하게 서 있던 나는 대걸레를 들었다. 화장실 안에서는 아까 그 취객이 또 다른 피자를 만드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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