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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소설

[단편] 김의 공식 (1)

by 히말

놈의 얼굴에는 김이 묻어 있었다. 개김. 나는 절대 일을 하지 않아. 그렇게 말하는 듯한 그의 눈은 가늘고 옆으로 긴 실눈이었다.


나는 대걸레를 들었다. 낮에는 화장실 물통에 담겨 있는 게 보통이지만, 밤 시간에는 사무실 겸 창고로 쓰는 뒷방으로 통하는 문 옆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있는 대걸레.


척결 대상은 출입문 옆, 쓰레기통과 전자레인지 사이에 있었다. 해장 삼아 먹으려던 컵라면의 잡다한 내용물과, 알코올과 함께 뱃속에 어떻게든 들어가 있다가 들어갔던 곳으로 다시 튀어나온 여러 가지 안주의 물리적 분쇄 혼합물이 뒤섞인 그것은 우주적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저 처참한 혼합물을 대걸레로 치우는 일은 놈의 몫이다. 원래부터 그렇게 주장하지 않았던가. 처음에 이곳에 오자마자 그는 각자 할 일을 분명히 나눠서, 효율적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그걸 사장이 덥석 받았다. 내게 묻지도 않고.


편의점 야간 알바 따위, 그만둬 버리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나는 그 단순한 옵션을 행사할 처지가 못 되었다. 돈도 필요하고, 낮 동안 취업 준비를 하려면 가까운 곳에서 알바를 해야 했다.


더구나 나는 최저임금에서 무려 10%나 더 받는 처지였다. 알바 자리를 옮기면 다시 최저임금부터 시작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어떻게든 나는 그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남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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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봤을 때 좀 놀랐다. 나이가 꽤 있어 보였다. 편의점 야간 알바 자리는 젊은 남자들의 몫이다. 강력 사건 때문만은 아니다. 막상 그런 일이 벌어지면, 젊은 남자라도 항복하는 것이 상책이다. 실제 사건까지 가지는 않지만 약간의 육체적 대응이 필요한 일, 말하자면 술에 취해 판단이 흐려진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 따위를 위해 젊은 남자가 필요한 것이다.


놈은 아무리 젊게 봐줘도 30대 후반은 되어 보였다. 후리따? 드디어 한국에도 그게 상륙한 건가. 편의점 알바로 10년 넘게 생활해왔다면, 직업으로 쳐줄 만하지 않은가.


그렇게 오랫동안 편의점 알바를 해오면서 놈이 익힌 기술은 단 한 가지였다. 일 안 하기. 그게 어떻게 기술이 되냐고 묻는 사람은 아마 직장 생활을 해보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직장 생활 4년여 동안 내가 만난 거의 모든 사람은 같은 하소연을 했다. 팀에서 자기만 일을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일도 하지 않고 월급을 가져간다, 내가 그런 놈들 뒤치다꺼리나 하려고 여태까지 학교 다녔나, 그런 이야기들이다. 하긴, 내가 지금 하려는 이야기도 그런 이야기다. 문제는 그게 풀타임 일자리도 아니고 알바 차원에서 벌어졌다는 것이다.


내가 놈을 만난 건 5년쯤 전이다. 군대 다녀오고, 졸업을 어떻게든 미루면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지만, 도저히 점수가 나올 각이 아니어서 일반회사 취직으로 방향을 선회하고 알바로 생활비를 벌던 20대 마지막 시기였다.


고시원에서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에 있는 편의점 중에서는 그나마 가장 규모가 큰 편의점에 알바생으로 들어갔다. 시간대별로 직원도 두 명이나 되었다. 벌이가 충분한지, 주인은 편의점 일을 하지 않았다. 가끔 알바생이 펑크를 냈을 때 대타를 뛸 뿐이었고, 발주도 대개 직접 하지 않고 경력이 좀 있는 알바생에게 맡겼다.


편의점 알바를 시작하고 두 달이 지나서 일이 웬만큼 손에 익었을 때였다. 함께 밤 시간에 일을 하던 형이 무역회사에 취직되었다면서 알바를 그만두었다. 낮에 면접 보러 다니고, 밤 시간에 편의점 알바를 하는, 같은 처지의 취업전선 동지라서 정신적으로 꽤 위안이 되던 형이었다. 알바를 그만둔다니 만감이 교차했다. 무엇보다 부러웠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는 며칠 걸리지 않았다.


새 알바 직원이 오는 데 이틀이 걸렸다. 첫날은 사장이 함께 일을 했지만, 둘째 날은 혼자였다. 너무 일이 많아 죽을 것 같다고 사장에게 하소연하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던 셋째 날, 출근해 보니 놈이 와 있었다. 그놈의 실눈.


'처음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라는 기억은, 아마도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정당화하려는 뇌의 날조에 불과하겠지만, 놈을 처음 보았을 때 그 실눈이 신경 쓰였던 건 아마도 진실일 것이다.


놈은 일하기 전에 제안할 것이 있다고 했다. 둘이서 그냥 일이 생기는 대로 '랜덤하게' 하는 것보다는, 체계적으로 일을 나눠서 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체계적이라니. 그런 단어에 속아 넘어가다니.


손님이 많을 때는 둘 다 카운터 일을 봐야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내가 카운터와 판매 등을 맡고, 놈이 다른 잡무를 맡겠다는 제안이었다. 희한한 제안을 받고 이게 말이 되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사장이 끼어들었다. 일단 그렇게 해보자는 것이었다.


사소한 부분은 차차 조정해 나가면 되니, 일단 업무를 그렇게 나누라고 했다. 나는 카운터를 보는 등 물건 판매와 관련된 부분을, 놈은 나머지 부분을 맡는다. '등'이 왠지 꺼림칙했지만 사장이 그냥 결론을 내려버리는 바람에 나에게는 말할 기회도 없었다.


그때, 분명히 이야기했다면 뭐가 좀 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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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밤, 일을 시작하면서 편의점에 잡무가 뭐가 있을까 생각해 봤다. 제일 먼저 생각난 건 청소였다. 바닥 청소야 뭐 별거 아니지만, 진짜는 쓰레기통과 토사물이었다. 라면 국물을 따로 모으는 쓰레기통도 싫었지만, 제일 싫은 건 취객들이 만들어내는 즉석 피자였다. 평일에는 이틀에 한 번, 주말에는 매일 두 판. 그걸 내가 처리하지 않아도 된다면 꽤 괜찮은 딜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른 잡무라면, 짐 정리였다. 생수가 이른 아침에 들어오는데,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다. 이 편의점은 도로의 일부를 점유하고 물건을 쌓아놓고 팔았다. 매장 바깥쪽에 쌓아놓고 파는 대표적인 물품이 생수였다.


2리터짜리 6개들이 생수를 좀 싸게 팔면, 사람들이 생수 값을 계산하러 들어와서 이것저것 더 사간다. 그래서 편의점치고는 생수를 꽤 많이 팔았다. 아침마다 12킬로그램짜리 생수 식스팩을 스무 개는 받았던 것 같다. 그걸 다른 사람이 옮겨준다면, 꽤 편할 것이다.


이른 아침 시간에는 김밥과 샌드위치도 들어왔다. 무게는 문제가 안 되지만 진열하는 건 또 나름대로 귀찮은 일이다. 그런데 김밥이나 샌드위치를 진열하는 것은 혹시 저 '등'에 해당하는 것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카운터를 보는 '등' 물건 판매와 관련된 부분.


닭 다리와 핫도그를 끓는 기름에 튀겨 투명 박스 안에 진열하는 것도 귀찮은 일이었는데, 생각해 보면 이것도 '등'에 해당하는지 아리까리했다. 편의점은 물건을 파는 곳인데, 그렇게 따지자면 판매와 관련되지 않은 부분이 어디 있나?


갑자기 불안한 마음이 들어, 놈이 어디 있는지 눈으로 좇았다. 밤 시간에는 손님이 몰리는 일도 별로 없다는 걸 아는지, 놈은 처음부터 카운터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고 간이 식사용 테이블, 그러니까 가게 유리 벽에 붙어 있는 라면 테이블 옆 의자에 앉아 잡지 책을 보고 있었다. 입으로는 삼각김밥을 게걸스럽게 오물거리고 있었다.


그거 계산하고 먹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나이도 나보다 열 살은 많아보이는 사람에게, 그것도 함께 일하는 첫날에 그런 질문을 하는 게 좀 버겁게 느껴졌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계산을 했을 리가 없었다. 내가 계속 카운터를 보고 있었고, 놈은 이쪽으로 오지도 않았으니까. 한참 동안 속으로 끙끙 앓다가, 다음번 손님이 계산하고 나가면 꼭 물어보리라 다짐했다. 놈은 낄낄거리면서 잡지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야구 모자를 눌러쓴 공시생 분위기의 남자가 담배를 한 갑 사고, 빠르게 돈을 내고 사라졌다. 자, 아까 스스로 약속한 대로, 삼각김밥을 왜 공짜로 먹었냐고 다그칠 때다. 놈을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놈도 나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마치 뱀에게 응시당하는 느낌이다. 오싹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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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존재는 삼각김밥 도둑이었다. 내가 위축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나는 숨을 한 번 길게 들이쉬고 내쉰 다음, 말했다. "그 삼각김밥, 계산하고 드셔야죠?"


"유통기한 지난 거야." 마치 준비라도 해뒀는지, 놈은 곧바로 쏘아붙였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없었다. 삼각김밥은 이른 아침에 배달된다. 제조 시간이 대개 아침 5시 정도고, 유통기한이 22시간이므로 새벽 3시는 돼야 폐기 처분이 가능하다. 그런데 아직 밤 근무 시작한 지 한 시간도 안 된 시점, 그러니까 새벽 1시도 안 됐다. 삼각김밥을 우물거리던 그 입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삼각김밥은 세 시가 지나야 폐기한다고요." 나는 추가설명을 했다.


놈은 나를 한 번 더 쏘아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넓데데한 얼굴에는 광대뼈 쪽으로 가로 주름이 나 있어서, 마치 실눈이 네 개라도 되는 것처럼 보였다. 비홀더(beholder). 레벨 8부터는 석화 광선 발사 가능. 저놈은 과연 몇 레벨일까?


놈은 성큼성큼 간편식 진열대 쪽으로 걸어가더니, 삼각김밥 한 개를 더 집어 들었다. 삼각김밥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나서, 놈이 말했다. "어, 정말이네. 아까 잘못 봤나?"


"천칠백 원입니다." 나는 최대한 사무적인 톤으로 말했다.


놈은 이리저리 돌려보던 삼각김밥을 매대에 내려놓지 않고, 오히려 포장지를 뜯었다. 그러더니 눈을 들어 나를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도발이 아니라고 생각하려면, 정말 핑계를 백 가지는 생각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상황판단에 애를 먹는 나를 도와주려는 건지, 놈은 포장지를 매장 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리고 삼각김밥을 한입 꽉 깨물었다. 그리고는 나를 바라보면서 우물우물 씹었다.


"삼천... 사백 원이네요." 그렇게 말은 어떻게 꺼냈지만, 아마도 식은땀을 흘렸을 거라고, 나는 기억한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나?


놈은 삼각김밥의 유통기한이 끝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오히려 하나를 더 훔쳐먹었다. 그것도 카운터를 지키는 나를 째려보면서. 도둑이라면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이라도 했을 텐데, 강도라면 경우가 다르다. 그러니까, 나는 놈과 함께 일을 하게 된 첫날, 불과 한 시간도 지나기 전에 놈에게 강도를 당한 것이다.


놈은 잡지를 펼쳐 놓은 라면 테이블로 돌아가서 앉았다. 그리고 나를 다시 한번 쏘아보더니, 잡지를 보며 낄낄거렸다. 레벨 8 이상이 틀림없었다. 이따금 석화 광선을 쏴서 나를 돌로 만들어 버리고, 뭐든지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는 계산. 아마 그게 놈의 근무 방식, 또는 생존 공식인 모양이었다.


얼굴에 개김이 붙은, 공식대로 일을 하는, 아니 일을 안 하는 놈. 김공식. 그렇게 나는 놈의 이름을 분명하게 외웠다.


그렇게 놈과의 첫 근무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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