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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Jan 19. 2023

고통을 인내하는 방법, 사색

[책을 읽고] 대니얼 디포, <로빈슨 크루소>

영화 <올드보이>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15년이라고 미리 알려줬다면, 버티기 더 편했을까?



로빈슨 크루소는 섬에서 28년을 보냈다. 같은 질문을 하고 싶다.


섬에서 4년을 지내고 나서, 로빈슨은 결국 어떤 새로운 마음가짐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이제 나는 세상을, 나와 무관하게 동떨어졌으며 기대할 것도 없고 진정 아무런 욕심을 부릴 것도 없는 대상으로 바라보았다. (중략) 내세에 가서 바라보게 될 세상처럼, 말하자면 한때 나도 살았었지만 이제는 빠져나오게 된 세상처럼 이 세상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244쪽)


진정한 초탈의 경지다. 비록 종교의 힘을 빌었다고는 하나, 그건 시대적 한계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 증거는 곧 나온다.

   

이런 공포감이 내 모든 종교적인 희망을 쫓아냈다. 하느님의 선의에 대한 놀라운 경험에 근ㄹ거한 하느님에 대한 확신이 싹 사라져 버렸다. (298쪽)


발자국을 발견한 충격으로, 모든 종교적 신념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



어린이 소설로 읽을 때는 어떻게 거처를 마련하고, 농사를 짓고, 도구를 만드는지를 재미있게 읽었다. 지금 읽으니, 그런 부분들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이 소설은 주인공의 심적 변화를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하게 다룬다.


식인종들을 처치해 버리겠다고 생각하던 중, 로빈슨은 자기 생각을 논박한다. 그들은 로빈슨에게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들이 사는 방식은 원래 그랬으며, 종교나 문화에 의한 교화의 기회도 없었다.   


그들을 급습한다는 것은 정당한 일일 수가 없었다. 그런 내 행동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자행되고 있는 스페인인들의 온갖 잔혹 행위를 정당화시키는 일일 것이다. (325쪽)


사람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운명임에도, 로빈슨은 타인이라는 존재에 대해 극도의 공포를 보인다. 오직 그 요소만 제거된다면, 그는 남은 생을 섬에서 행복하게 살 것이라 생각한다.   


어느덧 섬 생활 23년째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제는 섬 생활에 너무 익숙해져서 야만인들이 찾아와 방해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할 수만 있다면, 동굴에서 늙어 죽은 염소처럼 자리에 누워 죽는 순간까지 만족해하면서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굳이 매슬로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생존 자체에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교감이나 정서적 유대감은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기본적인 생존 욕구가 채워진 다음에는 타인과의 유대를 즐길 여유가 생긴다. 프라이데이를 구해 같이 살게 된 해에 대해, 로빈슨은 이렇게 말한다.   


이 해가 섬에서 산 모든 기간 중에서 가장 즐거웠던 해였다. (403쪽)


결국 주인공은 인간 세상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의 행복도는 나아지지 않았다.   


섬에서 조용히 살던 때보다 훨씬 더 많은 걱정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섬에서는 내가 가진 것 외에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었고 내가 원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반면에 지금의 나는 엄청난 짐을 짊어지고 있었다. (544쪽)


예전에는 이런 종류의 책을 읽을 때 이것이 어떤 다른 것을 상징할까 생각하고는 했다. 지금은 그냥 액면 그대로를 받아들인다. 화자와 주인공의 입장에 몰입하게 된다. 나라면, 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간접 경험을 통해 뭔가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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