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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May 11. 2023

사과파이 만들기, 엄근진 모드

[책을 읽고] 해리 클리프, <맨땅에서 애플파이 만들기> (4)

대통일 이론 후보들


초끈이론이 웃기는 이유는, 반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초끈이론은 10^500 종류가 존재한다. 그중 하나를 반증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여전히 10^500-1개를 더 반증해야 한다. 하루에 한 개를 반증하더라도 우주가 끝날 때까지 반증 못할 것이다.


일부 비평가들은 그래서 초끈이론을 theory of everything이 아니라 theory of everything else라고 조롱한다.


다중우주는 간단히 말해 "모든 것이 우연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야말로 무한한 수의 다중우주가 존재하는데, 우리 우주가 마침 딱 맞게 미세조정된 우주라고 말하는 것이니까. 이는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회피하는 것에 가깝다. 다중우주보다는 신이 우주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편이 훨씬 낫다는 것이 저자의 의견이다.


빅뱅 이론의 필수 요소로 여겨지는 인플레이션 이론조차 수많은 버전이 존재한다. 우주는 아직도 모르는 것 투성이다.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무지까지 생각하지 않아도 말이다.



맺음말


때는 서기 8억 4,300만 년, 10^19GeV(대략 플랑크 에너지) 스케일의 입자가속기가 드디어 완공되었다. 신사 숙녀, 무형의 에너지로 존재하는 생명체와 생각하는 균류 등 우주의 지적 존재들이 모인 자리에서 공식 행사를 시작하려는데, 프랑스 대표단이 공동성명문은 은하 공용어 버전과 프랑스어 버전 두 가지로 동시에 발표되어야 한다고 우긴다. 그리고 드디어 입자가속기를 돌리는 순간...


저자가 이 책의 말미에 쓴 초단편 SF다. 그는 덧붙인다. 


우리는 우주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622쪽)


류츠신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삼체>에서는 양성자 하나를 종이접기하듯 접어 지자라는 것은 만들더니, <사신의 영생>에서는 우주 전체, 그것도 우주의 끝과 시작을 이어붙이는 스케일을 보여준다. 빛의 속도가 상수가 아니며, 심지어 그것이 기술에 의해 강제된 값이라는 상상은 탄성을 자아낸다.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다. 생각해보자. 우리가 어떤 상자 안에 동물이나 곤충을 가둬 놓는다면, 외부에서 어떤 힘을 가해서 우리는 상자 내부의 다양한 물리 조건을 조작할 수 있다. 상자 내부에 갇혀 있는 존재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세계가 돌아가는 규칙을 추론하겠지만, 그건 그냥 우리가 만든 조건일 뿐이다.


우주의 비밀에 다가가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감한 상상력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류츠신이 떠올랐다.


책의 부록에는 정말로 사과파이 만드는 법이 나온다. 쿼크와 글루온이 등장하는 장면까지는 어지럽다. 그 다음엔 조금 쉬워진다. 그러나 파이 껍질을 만드는 장면부터는 다시 어렵다.


밀가루, 설탕, 소금, 레몬제스트, 버터를 그릇에 넣고 빵가루처럼 될 때까지 섞은 후, 미리 풀어둔 계란과 물을 넣고 덩어리로 뭉칠 때까지 저어주세요. (650쪽)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게 한 책이었다. 우리는 우주의 비밀을 풀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이미 데이비드 흄이 오래 전에 증명했다. 귀납은 그 어떤 것도 증명할 수 없다.


그러나 산을 왜 오르는가? 꼭대기에 서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르기 위해서 오르는 것이다. 우주의 비밀을 확증하는 날은 오지 않겠지만, 그 방향으로 인류가 계속 나아가는 이유도 같다.


대중에 너무 안 알려진 디랙. 저자에 따르면 현대물리학에서 그보다 더 중요한 인물은 아인슈타인뿐이다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까운 토막 상식


- 1디랙 = 1시간 당 단어 1개만 발설하는 대화 빈도


- Alice와 Bob은 1978년 암호학 관련 논문에서 처음 등장했다.



사족


아서 에딩턴이라는 사람은 알면 알수록 대단한 사람이다. 다양한 분야에서 이렇게 많은 업적을 남기고 노벨상을 받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프레드 호일도 이 사람의 책을 읽고 우주물리학의 길로 들어섰다 한다. (나중에 호일이 괴퍅한 옹고집쟁이로 변신한 것은 에딩턴의 책임이 아니다.)


천재적인 물리학자들의 성격이 괴퍅한 경우는 많지 않다. 대개 성격이 온화하거나(아인슈타인) 조용하다(디랙). 지랄 맞거나(호일) 중2병 관종(파인만)인 경우는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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