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미영의 <살례탑>은 내가 아주 좋아하는 만화다. 이 정도 작품성을 갖춘 만화는 정말 드물다.
현재로 다시 돌아온 주인공이 건방진 후배들을 상대로 검도 자세를 잡았다가 푸는 장면은 정말 명장면이다.
그런데 이 책에 딱 한 군데,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
고려 시대로 회귀한 주인공은 몽골 침략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휘말린다.
이런저런 고생을 하던 그는 제2차 몽골 침입 시점에 하필 처인성 근처에 머문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김윤후를 만난다.
역사는 김윤후가 활을 쏘아 살리타이를 죽였다고 하지만,
픽션인 이 책에서는 당연히 주인공이 살리타이를 죽인다.
김윤후는 말하자면 확인 사살을 한 셈이 된다.
우연히 민가에서 김윤후를 만난 주인공.
김윤후 옆에 웬 꼬마가 돌아다닌다.
김윤후가 꼬마야, 하고 부르니까, 꼬마가 대답한다.
- 나도 엄연히 이름이 있어요. 배.중.손.이라고요.
김윤후를 등장시키는 김에, 작가는 나중에 대몽항쟁을 이끌 꼬마를 깜짝 출연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개연성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귀여운 개구쟁이로 그려진 배중손을 향한 작가의 따스한 시선이 불편할 뿐이다.
***
배중손과 삼별초는 과연 침략자에 맞서 싸운 애국자들일까?
조선 깡패가 나와바리를 지키기 위해 일본 깡패를 물리쳤다면, 그게 애국인가?
그는 그저 자기 이익을 위해 행동했을 뿐이다.
그는 그렇게 지켜낸 나와바리에서 조선 사람들을 등치며 살았을 것이다.
버나드 말라무드의 소설, <조수>에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이 짝사랑하던 주인집 딸이 어떤 나쁜놈에게 성폭행을 당할 상황이 벌어진다.
그녀를 스토킹하던 주인공은 그 나쁜놈에게 달려들어 그를 쫓아낸다.
그리고 자신이 주인집 딸을 성폭행한다.
삼별초는 최씨 정권이 만든 사병 집단이다.
경대승이 신변 위협을 느끼고 만든 호위 조직 도방의 확장판이라 보면 된다.
최씨 정권이야말로 일제 시대 친일파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악랄한 정권이었다.
왕을 볼모로 잡고, 백성들은 죽도록 방치한 채 강화도에서 매일 댄스 파티 벌이던 놈들이다.
최충헌이 잘한 일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건 아마 동생 최충수를 죽인 것 정도 아닐까. (이의민도 죽이긴 했네.)
최충수는 형보다 더 악랄한 지도자가 될 자질을 보였으니 말이다.
그 최씨 정권이 (나쁜놈들이 늘 그렇듯이) 내부 분열로 작살나고 나서도, 삼별초는 김준, 임연, 임유무를 차례로 모시며 잘 살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삼별초보다는 그들이 모시던 <회장님>을 욕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몽골과 화친한 고려 왕실이 개경 귀환을 결정한 다음 그들이 들고 일어선 것은 전혀 다른 얘기다.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닌가.
악행을 벌이고 나서 대가는 받지 않겠다는 심보가 이완용, 이승만보다 나을 게 뭐가 있냐는 말이다.
경대승이 죽고 나서 도방 장사들은 모조리 문초를 당했으며, 거의 전부가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깡패 집단이 더 강력한 깡패 집단에 의해 압살당했다.
그런데 항복한 놈들 다 죽일 분위기다.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 당장 죽지 않으려면 발악이라도 해봐야 한다.
그게 삼별초 <항쟁>이다.
(물론 탐라도민들의 민란이 가세한 김통정 휘하 삼별초의 난은 조금 다르게 볼 여지가 있지만, 그것 역시 민란에 도적떼가 가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탐라도민들의 항쟁은 그들의 당연한 권리였으나, 김통정과 그의 일당은 그냥 악당들일 뿐이다.)
삼별초는 국토를 침략한 몽골군과 싸우지 않았다.
끝까지 숨어 있다가, 죽을 상황이 되니 발악을 한 것뿐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또 수많은 민초들이 죽어나갔다.
***
아직도 기억하는 선생님들이 몇 분 계신다.
고등학교 국사 선생님도 그중 한 분인데,
그는 <국정 교과서>로 <주입식 교육>을 하던 시대에 이런 얘기를 하셨다.
- 삼별초가 대몽 항쟁을 했다고 교과서에 쓰여 있지만, 과연 그들이 애국심에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그 시대에 희귀하게나마 그런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