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생각 없이 역사 관련 유튜브 영상을 보는 중이었다.
명종은 암군이다, 라는 말이 나왔다.
암군은 고사하고 존재감도 없는 명종.
암군이란 과연 뭘까.
이 단어를 들으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만력제다.
이상한 일이다.
만력제는 분명 암군이지만, 그보다 더한 암군들도 많고,
무엇보다, 만력제가 중국인에게는 확실히 암군이지만, 우리에게는 딱히 그렇지도 않다.
도요토미의 침략에 맞서 같이 싸워주지 않았던가.
(물론, 그때 이씨 왕조가 망했다면 우리 역사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갔을 것이기는 하다.)
이씨 조선에 국한해서 암군을 생각해보자.
연산군은 당연하고, 그 다음으로는 인조, 선조, 고종 정도가 떠오른다.
세도 정치 시기의 순, 헌, 철,
그리고 도대체 뭘 했는지 모르겠는 명종, 예종, 효종, 현종도 일단 후보에 넣고 생각해 보자.
암군 아님
장희빈의 아들, 경종도 넣고 싶은 사람들이 많겠지만, 아니다.
아주 조금만 조사해보면, 경종은 그냥 놔뒀을 경우 훌륭한 임금이 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걸 알 것이다.
노론과 함께 그를 압박한 연잉군이 좋은 임금(영조)이 되었으니 다행이지, 인조 시즌2가 되었을 수도 있는 시나리오였다.
이미지 안 좋은 왕으로는 세조도 있다.
딱 리처드 3세 삘 나는 악당이지만, 그건 정치 차원의 일이다.
단종과 그의 충신들에게는 철천지 원수지만, 백성에게는 좋은 임금이었을 것이다.
신하들에게는 최악이었지만 백성들에게는 나쁠 게 없었던 명 태조 주원장과 마찬가지다.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문종은 조선왕조 최고의 임금 중 하나다.
세종 집권 후반기는 문종이 사실상 왕 노릇을 했으며, 그로 인한 과로로 일찍 죽었다고 봐야 한다.
문무겸장은 기본이고, 명나라 사신이 놀랄 정도로 미남이었다고 한다.
암군 확실
일단, 연산군, 인조, 선조, 고종, 순조는 당당한 암군들이다. 별 설명이 필요없다.
연산군과 인조는 사이코패스가 확실하다.
선조는 전생이 장비였던 걸 제외하면 봐 줄게 없다.
(장비가 왜 이딴 놈으로 환생했을까 하는 문제는 별도로 하자.)
전생 형(만력제) 잘둔 덕에 오래 살면서 참 많은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쳤다.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선조와 인조는 조선 시대 최고의 명필들이다.
글씨가 인성을 드러낸다는 말은 헛소리가 틀림없다.
순조는 정조 아들씩이나 돼서 어떻게 그렇게 무능할 수가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능력만 문제가 아니고, 일을 하고 싶은 생각 자체가 없었다.
대리청정을 했던 효명세자가 조선 왕들 평균 수명(47세)만 살았어도, 김씨 세상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왜 22세에 죽었을까? (그 아들 헌종도 21세에 죽었다.)
암군 글쎄
미묘한 케이스들을 살펴보자.
헌종은 세도정치 시대, 즉 순헌철 3인방의 하나이니 일단 암군으로 보는 게 맞겠지만,
8세에 즉위했고, 수렴청정이 끝난 것이 그가 15세였을 때이니, 억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친정한 기간이 5년이 넘는다. 무조건 면죄부를 주기는 어렵다.
노력했다고 명군이라면, 숭정제도 명군이다.
철종은 더 불쌍한 케이스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강화 도령"이었다.
반역죄를 뒤집어 쓰고 강화도에서 농사 짓던 양반이다.
그는 분명히 노력을 했다. 그러나 헌종보다 더 심한 페널티를 받고 게임을 해야 했다.
드라마 <철인왕후> 때문에 철종이를 빼주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지만, 역사와 픽션을 헷갈리면 곤란하다.
암군 합격
명종에 대해서라면, 그가 익선관을 써보라고 했을 때 선조가 했던 위선 쇼가 떠오를 뿐이다.
지금 살펴보니 재위 기간이 22년이나 되는데 한 일이 없다.
이렇게 보면 만력제형 암군이라 볼 수 있겠다.
선조에게 후사를 잇게 한 것이 명종 최악의 악행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명종이 급사하자 선조를 왕위에 앉힌 것은 영의정 이준경을 비롯한 신하들이었지만,
위의 에피소드에 나오듯이 명종이 선조를 점찍어 놓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효종의 키워드는 북벌이다.
외침과 사이코패스(인조) 때문에 피폐해진 나라 살림은 신경 쓰지 않고 복수를 하겠다는 가당치 않은 생각으로 나라를 거덜냈으니 아주 훌륭한 암군이다.
현종하면 생각나는 건 종기뿐이다.
아, 하나 더 있다. 경신 대기근.
경신 대기근은 갑자기 닥친 소빙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지만, 같은 시기 중국은 멀쩡했다.
당시 청나라 황제가 강희제였다는 점에서 비교당하는 현종은 억울하겠지만,
경신 대기근은 자연재해의 단순한 결과가 아니라 인재가 더해진 재난으로 봐야 한다.
종기 고치겠다고 온양 온천에서 살다시피한 왕이 15년이나 왕 자리에 앉아 있었으니, 백성들이 불쌍하다.
예송 논쟁으로 신하들에게 휘둘려서 송시열이 왕처럼 보이게 한 것도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
예종은 아버지에게 세조라는 말도 안 되는 묘호를 바친 것이 무엇보다 짜증난다.
태조 이후 처음으로 '조'를 받은 것이 세조라?
실제로 조선 왕들 중 '조'를 받은 것들은 영조, 정조를 빼면 죄다 암군들이기는 하니, 박자가 맞는 듯도 하다.
재위 기간이 1년밖에 되지 않으니 암군이라는 말을 듣기에 억울하기는 할 것이다.
이씨 조선은 기본값이 암군
조선은 쿠데타로 시작한 나라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성계도 아들의 쿠데타로 실각했다.
이건 뭐 무신정권 시즌2다.
조선은 대대로 암군이 다스린 나라이므로 암군이란 단어를 딱히 쓰지 않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든다.
디폴트 값이 암군이고, 세종, 영조, 정조 같이 예외적인 경우만 명군으로 재분류하는 게 낫겠다.
역사를 부끄러워하는 것은 별 쓸모가 없는 자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신라와 조선이라는 나라가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