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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Jun 07. 2023

성선설 대 성악설

[책을 읽고] 뤼트허르 브레흐만, <휴먼카인드> (1)

인간 본성이 선하다는 걸 보여주겠다는 저자.

맹자, 그리고 스티븐 핑커를 생각하며 읽고 있는데, 저자는 스티븐 핑커조차도 반박한다.

(아쉽게도 맹자는 이야기도 안 꺼낸다.)


우선, 내용을 살펴보자.


1부 <자연상태의 인간>에서는 인간 본성이 선하다는 주장을 편다. 

루소 식의 <고상한 원시인>이라 할 만한 이야기인데, 저자는 스스로를 길들이는 것이 인간 본성의 핵심이라 말하면서 인간을 <호모 퍼피>라고 명명한다.

가당치 않은 라틴어를 배제하고 그냥 읽기만 해도 귀여운 느낌이 터지는 퍼피라는 단어를 쓴 점이 좋다.



2부 <아우슈비츠 이후>에는 성악설을 지지하는 것처럼 해석되었던 그간의 실험들을 반박한다.

스탠퍼드대 교도소 실험, 스탠리 밀그램의 전기 충격 실험, 그리고 <방관자 효과>로 유명한 키티 제노비스 살해 사건이 모두 조작되었거나 잘못 알려졌다는 것이다.

특히 스탠리 밀그램을 주적으로 규정하는 장면은 인상 깊다.

세상 좁은 학계에서, 웬만한 각오가 없다면 하기 어려운 발언이다.


3부 <선한 본성의 오작동>에서는 인간 본성이 선함에도 비극이 벌어지는 이유를 살펴본다.

나치 병사들은 광신적 나치주의자나 애국자라서 열심히 싸운 것이 아니라, 동료애 때문에 열심히 싸웠다고 한다.

즉 연대라는 감정을 통해 인간은 악을 행할 수 있으며, 악행으로부터 거리가 멀 수록 실행이 쉽다.

칼로 찌르는 것보다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 훨씬 쉽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잘 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인류가 수렵, 채집의 방랑 생활을 끝내고 국가와 문명을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공감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부분은 폴 블룸을 거론하기도 한다.


4부 <새로운 현실>에서는 경제적 보상의 한계를 지적하며, 인간 행동을 유도하는 새로운 방법들을 소개한다. 그것은 놀이(호모 루덴스)와 참여 민주주의다.


5부 <비대칭적 전략>에서는 먼저 선행의 손길을 내미는, 비대칭적 전략을 제안한다.

깨진 유리창 이론에 따라 불관용 원칙을 고수한 미국의 감옥은 여전히 포화 상태지만,

범죄자한테 이렇게 잘해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드는 노르웨이의 감옥은 범죄율 감소에 성공했다.



성악설을 믿는 이유


책을 펴자 마자 저자는 묻는다.

비행기가 착륙과정에서 세 동강이 났다. 어떤 일이 벌어질까?

행성 A에서 사람들은 서로 돕고, 질서 있게 탈출한다.

행성 B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짓밟고 밀치며 아비규환을 연출한다.


당신은 어떤 행성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대개 우리는 행성 B의 주민이라 생각한다.

노벨 문학상에 빛나는 윌리엄 골딩의 소설 <파리 대왕>이 잘 표현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통가의 작은 무인도, 아타 섬에 조난한 6명의 소년들은 <파리 대왕>을 연출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협력하며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살아 남았고, 결국 구조되었다.


https://www.vice.com/ko/article/4adky9/shipwrecked-on-uninhabited-desert-island 


생각해보자.

나는 <파리 대왕>이 매우 그럴 듯한 서사라고 생각하지만, 아타 섬 에피소드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난 딱히 성선설을 믿지 않지만, 비행기 세 동강 시나리오는 행성 A처럼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아포칼립스를 그린 명작 <드래곤헤드>를 보자.

사람들은 도쿄에 도착하면 뭔가 해결될 것이라 믿고 먼 길을 여행한다. (<서바이벌 패밀리>와 정반대 전개다.)

그곳에 도착한 주인공 일행이 알게 된 것은, 아포칼립스 사태가 일본에 국한해서 일어난 것이며, 세계 국가들은 일본 사태에 개입하지 않기로 했다는 사실이다.

세상 전체가 멸망하지 않은 것은 잘된 일이다. 행성 A에 한 표 던질 만하다.

그런데 절망에 빠진 일본을 구원하지 않겠다고? 행성 B에 두 표다.


비행기 세 동강 질문에서 내가 행성 A 시나리오를 믿는 이유는, 동강난 비행기 바깥의 세계가 온전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구원을 기대할 수 있다.

또한, 살기 위해 악랄한 행위를 할 경우, <긴급 피난>으로 인정받을지언정 도덕적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아주 악랄하거나 머리가 나쁜 경우가 아니라면, 사람들은 대개 행성 A 시나리오 대로 행동할 것이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내 결론은 이랬다.

우리가 행성 B의 주민이라 믿는 까닭은, 현실이 비정해서가 아니다.

현실이 우리가 원하는 수준에 약간 못 미치기 때문이다.

물론, 부정적 정보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므로 그쪽으로 진화한 결과이기도 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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