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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Jun 25. 2023

민주주의의 기본 조건과 그 한계

[책을 읽고] 얀-베르너 뮐러, <민주주의 공부> (1)

프린스턴 대학교 교수이자 미국인이지만, 이름이 말해주듯 그는 독일계다. 독일계가 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이상해 보일 수도 있지만, 아파 본 사람이 병에 대해 더 잘 아는 법이다.


2016년 이후, 원래도 그다지 이성적이지 않았던 정치판이 완전히 비이성적으로 진화했다. 이제 정치인들은 그럴 듯한 거짓말을 지어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그냥 말도 안되는 거짓말을 한다. 이런 세태를 한탄하는 책들은 이미 물릴 정도로 많이 나와 있다. 샐린저보다 은둔술이 뛰어나다는 미치코 가쿠타니가 책을 낼 정도다. 그녀의 책 제목,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지금의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로 망가졌는지를 제대로 보여준다.


이쯤 되면, 정치 혐오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가쿠타니가 말하듯, 정치 혐오야말로 그들이 원하는 것이다. 정치가 그들만의 리그로 정착하면, 그들은 그야말로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이럴 때야말로 정치에 다시 관심을 가지고, 원론적인 차원에서 공부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 민주주의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면, 죽어가는 민주주의를 되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민주주의의 기본 조건과  한계


민주주의를 되살리려면, 무엇이 민주주의인지 알아야 한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무엇인가? 저자의 대답은 이렇다.


민주주의는 동등한 투표권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언론과 집회, 결사의 자유도 있어야 한다. (23쪽)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위해 인프라가 필요한데, 그것은 물론 미디어와 정당(결사)이다. 언론사와 정당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저자의 주장은 꽤 당혹스럽다. 이들이야말로 정치 혐오를 부추기는 바로 그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는 결국 어떤 주장을 펼칠 자유를 뜻한다. 즉, 표현의 자유가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다만 그 자유에는 한계가 있다. 바로 배제다. 


누군가에게 그 자유를 배제하기 위해 자신이 말할 자유를 주장한다면, 그건 민주주의의 선을 넘는 행위다. 그리고 우익 포퓰리즘의 핵심은 바로 이 배제다. 나치는 유대인을 배제했고, 트럼프는 이민자를 배제한다. 배제는 한마디로 표현된다. "너는 자격이 없다."


우익 포퓰리즘의 핵심이 배제라는 점을 지적하는 저자의 통찰은 좋다. 그러나 배제에는 명시적 배제뿐 아니라 비명시적 배제도 있다. 조선 시대 과거 제도가 대표적인 사례다. 양인이라면, 즉 노비만 아니라면 누구든지 과거 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는 것이 법이었지만, 먹고 살기 바쁜 농민들이 과거를 치를 수는 없었다.


나는 빈부격차로 인한 비명시적 배제는 절대 없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입에 풀칠하기 힘든 상황에 정치에 관심을 가질 수는 없다. 그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하려면 빵을 줘야 한다. 좌익 포퓰리즘이 우려되는 지점이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것은 웃기지만, 그 반대는 가능하다. 나쁜 것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얘기다. 포퓰리즘은 모두 나쁘지만, 우익 포퓰리즘이 더 나쁘다. 그리고, 좌익 포퓰리즘은 실제로 좌익 포퓰리즘이 아닌 경우가 많다. 예컨대 아동 급식은 불과 10여 년 전에 좌익 포퓰리즘이라 매도당했다.


장성을 시찰 중인 진시황


21세기 포퓰리즘


포퓰리즘에 대해 논쟁을 시작하면, 결국 포퓰리즘이란 무엇인가 하는 전제에 동의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게 된다. 그러니 일단 포퓰리즘을 정의하자. 저자의 말대로, 포퓰리즘은 누군가를 배제하는 정치 행태다.


포퓰리스트는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이, 그리고 오직 자신만이 '진짜 국민' 또는 '침묵하는 다수'를 대표한다고 주장한다. (33쪽)


트럼프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미국적이지 않다'고 말하고, 모디는 사회에 존재하는 차별을 말하는 사람들을 분열주의자라고 말하며 '진정한 인도는 분열되어 있지 않고 조화롭다'고 주장한다.


나폴레옹 3세는 자신을 비판하는 언론에 대해 늘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게 누구더라?"라고 대응했다고 한다. 그러나 21세기 포퓰리스트는 그렇게 말할 필요도 없다. 전체 유권자의 선택이 아니라, '진짜 국민'의 선택만 받으면 되기 때문이다. 낮은 투표율을 지적하면, '침묵하는 다수'가 내 편이라 말하면 된다.


같은 의미에서 포퓰리스트는 언론 장악의 부담도 훨씬 줄어든다. 폭스 뉴스 같은 '진짜 언론'만 우리편이면 되는 것이다. 워싱턴 포스트나 아사히 신문 같은 '가짜 언론'이 뭐라 말하든, 개가 짖는 것으로 호도하고 무시하면 그만이다.


그래서 포퓰리스트의 주요 전략은 바로 양극화다. 진짜 국민을 결집시키기 위해서는 가짜 국민을 선명하게 정의해야 한다. 어중간하지 않은, 극단적인 대조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생각이라든가 하는 형이상학 차원의 차이점보다는 눈에 보이는 차이를 강조한다. 유대인의 코나 아랍인의 터번 같은 것 말이다.


다음 단계는 공포에 호소하는 것이다. 가짜 국민이 집권할 경우 나라가 망한다는 것이 흔한 레퍼토리다. 2016년 퓨 리서치 센터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공화당원의 45%, 민주당원의 41%가 상대 당을 '국가 안녕에 대한 위협'으로 보았다고 한다. 냉전 시기 (주로 미국의 사주로) 남미 국가들에서 종종 벌어졌던 행태, 즉 선거에서 패한 당이 선거 결과에 승복하는 대신 무기를 들고 산에 들어가 농성한 것과 비슷하다.


적의 승리는 용납할 수 없는 불의라고 믿는 이런 생각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좌익 포퓰리즘이라도 결국에는 우익 포퓰리즘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를 훼손한다.


일단 상대가 민주주의 게임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고 결론짓고 나면, 상대의 정치적 기본권 따위를 보호해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차베스와 마두로 집권 당시의 베네수엘라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71쪽)


소싯적 차베스. 누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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