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빤 왜 그렇게 도망만 치려고 해?"
"문제를 만났으면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지."
"왜 자꾸 도망만 치냐고. 그럼 끝나? 아니잖아."
"결국 만나게 되는데 왜 도망치냐고. "
어젯밤 여자친구에 들었던 말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들었냐고 물어본다면 어제의 일과를 나열해보겠다.
모처럼의 휴무, 평소보다 늑장을 부리며 점심이 넘어 일어났다. 푹 쉬었다는 기분보단 아무것도 하지 않아 하루를 날린 것 같다는 생각에 괜스레 기분이 나쁘더라.
디스크와 그간의 피로가 누적된 몸을 이끌고 샤워를 하니 흐리멍덩했던 정신이 조금은 돌아온다.
샤워를 해도 피로가 가시지 않는다. 며칠 전 먹다 남은 피자꽁다리를 먹으며 아침을 대신했고, 수면제를 받으러 병원을 갔다. 평소라면 오토바이를 타고 갔을 텐데, 요 며칠 내도록 비가 오느라 어쩔 수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택시를 탈까 고민했지만 조금이라도 돈을 아끼자는 마음에 버스를 택했는데 이게 시발점이었다.
네이버 지도를 보며 706번 버스를 탔는데……. 지도랑 다른 곳으로 간다.
아아, 망할 놈의 버스 방향. 네이버 지도 믿고 따라갔다가 엄한 데 동떨어졌다.
다른 버스를 타려 해도 배차시간 미정이고, 비는 날 익사시키려는 듯 미친 듯이 쏟아진다.
한숨을 쉬며 담배 하나를 피려고 하는데……. '???' 담배가 안 보인다. 이런 X발.
추측건대 버스에 두고 내린 것 같다. 정확히는 주머니에 빠진 걸 인지하지 못했다.
그냥 연초도 아니고 전자담배를 잃어버렸다. 일회용도 아닌 궐련형 전용 전자담배...
물론 협찬받은 거라 내 돈 주고 산 게 아니긴 한데 5만원짜리 물건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기분이 뭣하다.
비속어를 구시렁대며 택시를 잡는다. 예상금액이 만원이란다. 집에서 탔으면 기본요금에서 오천정도 나왔을 텐데……. 나는 한 시간 동안 벌써 육만원 넘게 썼다. 오만원어치 물품을 잃어버리고 외진 곳에서 택시를 타느라 만원 그리고 의미 없는 버스비 이천원. 진짜 인생 뭣 같다는 말밖에 안 나온다. 심지어 택시를 탔는데 내부가 담배 냄새로 가득하다. 짜증이 더해 속 깊숙한 곳부터 부아가 치민다.
그렇게 도착한 병원. 불행 중 다행인지 대기손님이 없었다. 평소라면 최소 한 시간 평균 두 시간 정도 기다렸을 텐데……. 병원에서 여자친구를 만났다. 내 안부를 묻는 여자친구에게 의도치 않게 말이 퉁명스럽게 나왔다. 아 싫다, 정말 싫다. 가장 잘해줘야 할 사람한테 내 감정을 쏟아붓는 내가 너무 싫다.
집에 가는 길, 여자친구가 말하더라.
"오빠, 왜 사소하게 안 좋은 일로 하루를 망치려고 해? 좋은 일도 있잖아?"
"좋은 일? 무슨 일?"
"오늘 휴일이라 일 안 갔잖아, 병원도 안 기다리고 바로 진료받았고, 지금 빗길에 사고도 안 나고 얼마나 좋아?"
안다. 여자친구가 어떤 의도로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그런데 내 마음이 마음대로 컨트롤 되지 않는 걸 어떡하냐고……. 심지어 우산까지 두고 왔다. 돌아가기엔 퇴근시간대라 차가 너무 막혀 버릴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가는 길, 목이 너무 뻐근하고 피가 안 통하는 느낌이 들어 한의원에 들렀다. 목부분에 침을 맞으니 어쩔 수없이 핸드폰을 할 수가 없었 눈을 감고 있었다. 의도치 않게 명상을 했는데 좋더라. 따뜻한 베드 덕에 몸이 노곤해지고 마음이 사르르 풀린다. 목에 피가 통하는 느낌이 드니 머리가 조금 맑아진다. 이제야 오늘이 어땠는지 돌아보게 된다.
우선 회사에 출근하지 않아 좋았고, 평소보다 늘어지게 잘 수 있었고,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움직였으며 항상 오토바이만 타던 내가 내 발로 직접 걸었다. 추적추적 오는 비 내음새를 맡았고, 첨벙첨벙 튀기는 웅덩이의 물이 시원했다. 오랜만에 탄 버스 덕에 20대 초반의 기억이 떠올랐고, 대기줄이 미어터지던 병원은 손님이 없었다. 돌아가는 길은 여자친구의 차로 편하게 갈 수 있었다.
그렇게 마음을 비우고 집에 들어가니 전자담배가 현관 앞에 있더라. 옘병. 나는 대체 뭣 때문에 화내고 감정 소비를 한 걸까...? 진짜 어이없는 하루, 아니 나 자신은 참 못난 놈이다. 올해가 가기 전 요가를 배워야겠다. 명상을 할 수 있도록. 내 마음을 비우고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