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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이상 Jan 09. 2023

묘한 냄새가 나는

40대 면접 수집가의 면접후기 모음⑧

어쩐지 찝찝한 냄새가 계속 났던 면접이 하나 있었다.


UX라이팅, UX라이터. 아름다운 단어이다.

텍스트를 쓰는 것으로, 나중에 혼자라도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라는 목표를 가진 내게 한 번쯤, 기회가 된다면 해보고 싶은 직무였다. 커리어의 종착점을 이 길로 가볼까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내가 먹고 살아온 직무에서 쓴 글과는 또 다른 결이라서, 유관 직무에 입사 지원을 지속적으로 해왔지만 결과는 늘 서류탈락이었다. '관련 경험도 배경도 없이 무모한 시도였나'라는 생각이 들 때쯤 UX라이팅 전문 회사에서 면접을 보자는 연락이 왔다. 그러니까 기업(고객사)의 UX라이팅을 대행해주는 대행사였다.


기사 검색, 회사 홈페이지 등을 통해 이쪽 분야에서 깃대를 제법 꽂은 회사로 이해했고 에이전시임에도 관련 경력을 쌓을 수 있겠지 하는 기대감도 있어서 흔쾌히 간다고 했다. 다른 기업이 되더라도 가서 괜찮으면 여기서 또 새 커리어를 쌓아보자 라는 희망찬 기대와 함께.


다만, 서류 결과가 두 달 뒤에 난 것이 조금 의아했다.(여름에 낸 서류가 가을에 통과되었다고 연락이 왔다.) 이 약간의 찝찝함은 면접이 끝나갈 때 쯤에는 확신으로 바뀌었다. 찝찝하다 못해 냄새가 났다. 사짜의 냄새가 낡은 사무실을 꽉 채우더라.


일단은 경력직 면접인데 면접관 1명에 면접 대상자가 두 명이었다. 뭐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데 경험상 흔한 일은 아니다. 상식적인 경우라면 이런 케이스는 미리 고지한다. 다수의 면접자가 함께 본다고. 언제, 어디로 오라는 문자 두 줄만 받고나서 가보니 복수의 면접자가 있는 것은 글쎄, 여기 말고는 보지 못했다. 냄새가 났다.


면접 대기 장소가 곧 대표의 방이었다. 그렇다. 면접관이 대표다. 작은 에이전시니까 이것이야 말로 그럴 수 있다. 그런데 방에서 일어난 일은 면접이 아니라 대표의 회사 자랑이었다. 회사 소개가 아니라 자랑. 갑자기 모니터를 켜더니 정리되지 않은 바탕화면 속에서 회사소개 PDF 하나를 찾더니, 시작되었다. 저희 회사가 어떤 회사냐면요.로 시작하는 프리젠테이션이.


40분 남짓 그 방에 있었던 것 같은데 체감상 회사 소개를 35분 쯤 들었던 것 같다. 여기서 또 이상한 냄새가 났던 것이 본인들의 UX라이팅 방법론이나, 성과는 공개를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 다른 회사들이 베껴갈수도 있다며. 영업비밀은 당연히 공개하지 않겠지만, 면접자에게는 이렇게 길게 설명하면서 성과를 숨긴다니, 그것도 고객사 영입이 필요한 에이전시가. 대표 얼굴에서 역시나 냄새가 났다.


아 질문은 없었다. 대표의 뺀질한 프리젠테이션 이후에는 궁금한 것을 물어보라고 하더라. 냄새에 취한 나는 참지 못하고 "성과와 방법론이 비밀이면 고객사는 어떻게 영업하나요?"라는 질문을 했는데, 안했어야 했다. 대표는 갑작스레 몸안의 피는 숨기지 못한다며 와서 세일즈를 같이 해보지 않겠냐고 권유했다. 자그마한 방안에 냄새가 흘러 넘쳤다. 사짜의 냄새가. '피는 당연히 안보여야지, 밖으로 보이면 다친 거잖아'라는 세상 쓸데없는 대답도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잘 참았다.


아, 피티를 마치고는 필기시험과 희망연봉 작성하는 시간이 있었다. 필기 시험지 끝에 희망연봉을 쓰더라. 필기시험은 어려운 문장을 쉽게 바꾸는 뭐 그런 것이었다. 10분인가 시간을 주었고 대한민국 정규교육 과정을 충실히 이행한 관성으로 성심성의껏 쓰고나서 희망연봉은 직전연봉에서 더 올려서 적었다. 연봉을 낮추더라도 이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저 냄새로 싹 사라졌다. 이 냄새에서 벗어나고만 싶었다.


종이를 얼른 제출하니 면접비 대신에 자신들이 만든 잡지 한 권을 손에 쥐어 주었다. 볼만하다고, 본인들이 이 전문 잡지도 만든다고. 낭비다 낭비야. 환경오염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좋은 기업은 규모와는 무관하다는 확신이 있다. 다만, 냄새가 나는 기업은 한번쯤 스스로를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비좁고 어두운 사무실에 빽빽하게 모여 어두운 표정으로 앉아있는 재직자들이 보인다면, 면접자에게 궁금한 것은 없고 회사 이야기만 주구장창 해댄다면. 그래서 냄새가 난다면 피할 필요도 있다.


아, 다음 날 문자로 오더라 떨어졌다고. 감사하다고 재빨리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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