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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이상 Jan 12. 2023

나혼자 백일장 한다

40대 면접 수집가의 면접후기 모음⑨

백일장. 

40대 아저씨인 나에게는 익숙한 단어인데 2023년에는 이 단어가 얼마나 쓰일지는 모르겠다. 글짓기 대회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데 면접장에서 나 혼자 글짓기 시험에 참여한 적이 있다.

물론, 면접관이 권유해서. 시켜서 한 것이다. 안해도 된다고는 했다. 직장이 간절한 시점이라 그냥 했다.


힙합에 비유하면, 프리스타일 랩을 해본 것이다. 

메모장을 열어두고. 즉석에서 한 소절 글을 써내려간 면접이었다. 라임이나 펀치라인은 없었던 것 같다. 지나고나니 뭐라고 썼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펀치라인 한 소절 정도는 있으면 좋았을 걸이라는 아쉬움이 지금 든다. 지난 일이다.


중견기업이라 자칭하지만 잡플레닛의 재직자 후기에는 어김없이 '여기가 무슨 중견이냐, 말이 중견이지 중소 아니냐'라는 글이 달리는 수 많은 코스닥 상장회사 중 하나였다. 내가 지나 온 회사들 보다는 번지르르해 보였다. 신분당선 어드매 역에 번듯한 사옥이 있었으니까.


1층 로비에 채용 실무자와 어색하게 앉아 있다가 들어간 회의실에는 임원을 포함하여 총 3명의 면접관이 앉아 있었고 사전에 고지된 대로 자기소개 PT로 시작했다. 먹고 살아온 길에 PPT, 프리젠테이션이라는 단어는 수시로 놓여있었기 때문에 준비한대로 잘 내뱉었다. 프리젠테이션 용 고유의 박자(플로우)도 타면서. 면접관들의 반응은 내 예상보다 더 호의적이었다. 박수와 칭찬이 면접장(아주 작은 공간이다.)에 가득찼다. 이게 사람들이 긍정적인 것인지, 면접자를 향한 우쭈쭈인지, 고도의 비아냥인지 헷갈리긴 했지만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요한 것 보다는 훨씬 나았다. 간만의 칭찬 세례는 찰나지만 달콤했다.


프리젠테이션 이후에 경력사항에 대한 몇 가지 질문을 받고 대답하는 평이한 인터뷰를 하다가, 임원 분이 '홍보하는 분들이 글을 잘쓴다고 하는데 사실 안 그런 분들을 많이 봤다'고 운을 띄웠다. 


나는 "제가 그래도 다른 동일년차 인원들 대비 글이 강점이 아닌가 합니다. 지난 회사 임원 분과 긍정적 관계로 있을 수 있었던 것은..."하고 낼름 사례를 들어 세일즈를 하려는데 "혹시, 글 써볼 수 있습니까?"라고 내게 물었다. 대답했다. "지금이요?"


저 '지금이요?'는 어떤 필터링도 없이 반사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임원은 "네, 괜찮으시면 지금 하나, 아무 주제로, 아무 글이나 한 번 써보시겠어요. 불편하시면 거절하셔도 됩니다." 


개발자 코딩 테스트는 많이 들어봤는데 PR담당자 글짓기 시험은 들어본 적도 없고,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취업이 간절한 상태이며 개근상 후유증이 있고 상명하복에 젖어있는 40대인 나는 이미 머릿 속으로 글을 쓰고 있었다. 다만, 어떻게 대답하면 조급해 보이지 않고 제법 실력있는 경력자 같을까를 고민하다가 "아닙니다. 온 김에 해보겠습니다."했다. 온 김에 해본다니, 펀치라인인가? 모르겠다.


그 이후는 인사 담당자가 띄워 준 메모장에 CEO 인사말을 하나 썼다.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온김에 했다고 뱉었으니까 썼다. 3분 정도 써서 완성했고 인사 담당자는 그 시간 동안 클래식 곡도 하나 틀어줬다. 뻘줌하지 말라는 의미일텐데 아마 담당자는 재미있었을 것이다. 내가 인사 담당자라면 분명히 재미있었다. 센 척하는 아저씨의 당황한 손을 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다 쓴 글을 한 번 훑더니 "00님은 어떻게 글이 마음에 드세요?"라고 또 물었고, "주제 정도는 보이지 않나 싶습니다." 하고 끝까지 센 척 하며 마무리했다. 온 김에 참석한 백일장 이후 두 번의 면접이 더 있었고, 저 기업에 최종 합격했다.


다음 주 부터 출근이다. 간 김에 잘 다녀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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