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1. 첫 직장의 기쁨과 슬픔

by Gemma Han

대학을 졸업하기 몇 달 전, 교수님의 추천으로 첫 직장에 발을 디뎠다.

세상이 말랑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만난 '사회'의 첫인상은 11월의 가을 날씨만큼이나 싸늘했다.


내가 맡게 된 일은 일본어 통역과 번역.

일본의 중견 기업과 내가 입사한 회사가 곧 합작 법인을 설립한다고 했다.

본격적인 협상을 앞두고 커뮤니케이션의 통로가 필요했고, 나는 300명 넘는 규모의 회사에서 유일하게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11월의 어느 월요일, 나는 배속받은 팀으로 출근했다.

문가 바로 앞.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그 자리에 앉은 나는


5일 동안 아무 일도 받지 못했고,

5일 동안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25살의 나에게 제대로 된 일을 시켜보지도 않은 채 사람들은 낙하산이다 뭐다 쑥덕댔다.

화장실에 갔다가 자리에 오면 내 자리 언저리에서 두세 명이 모여있다가 흩어졌다.

짓궂었던 남자 대리들은 일본어를 얼마나 하냐며 이것저것 물어오기도 했다. 주로 야동의 대사들.




출근 시간의 2호선 교대역.

'아, 이제 내려야지.' 하고 생각만 해도 인파에 끼어 어느새 몸은 전동차 밖으로 나와있는 마법 같은 곳.


출근하는 사람들의 패딩과 코트 사이에 끼어서 자의인지 타의인지 모를 걸음을 걷고 있자면 지금 내가 힘든 게 몸인지 마음인지 헷갈렸다.


그렇게 8개월 동안 진짜 나를 집에 걸어놓고 출근했다.

진짜 나를 데리고 출근했다간 매일의 스크래치를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즐거웠던 순간은 많지 않았다.


근무했던 부서는 유아교육과 관련이 있었고, 설립하고자 하던 합작 법인 역시 유아교육 회사였다.

유아교육 콘텐츠에 문외한이었기에 출근하면 최신 기사를 살펴보거나 유치원 관련 법령을 출력해서 읽어라, 라는 것이 팀장이 준 첫 업무였다.


하지만 눈으로 글을 좇기만 할 뿐, 유아교육에 관심이 전혀 없던 나에게는 좀처럼 입력이 잘 되지 않았다.

그저 빨리 일본에서 관계자들이 와서 회의나 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사무실에 있던 총무부 사원이 프린터 앞에서 자료를 출력하고 있던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유아교육을 전공한 건 난데, 한 00 씨가 왜 그 자리에서 그 자료를 보고 있는 거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지나치게 저돌적이던 그의 도끼눈이 아직도 생생하다.

내가 가만히 지내니 모두가 나에게 막 해도 된다고 합의라도 된 모양이었다.


나라고 지금 일이 달가운 건 아니에요,라고 하고 싶었지만 진짜 나를 집에 두고 나왔기에 그런 말은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나에게만 속삭이듯 독을 뿜어내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우리 둘은 하는 일은 달랐지만,

둘 다 원하는 일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은 같았다.


몇 달 후, 그는 어린이집 선생님이 되겠다며 회사를 떠났고, 나는 송별회에 가지는 않았지만 진심으로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같은 사무실을 쓰던 직원들보다 나의 커뮤니케이션 상대였던, 일본 측 직원들이 오히려 편하게 느껴졌다.

그 아저씨들은 회의로 출장을 올 때마다 나에게 면세점에서 초콜릿 사다주기도 했다.


포레스트 검프에서 나오는 초콜릿 상자의 우화 속 그런

초콜릿.

70개는 족히 되어 보이는 커다란 초콜릿 상자를 받은 날은 월급에 비할 수 없는 만족이 찾아왔다.


그날은 나를 백안시하던 직원들에게 초콜릿을 권하며 나누는 날이기도 했다.

마치 부모님이 면회 오면서 주신 간식을 나누던 이등병처럼 달떠있었다.


회사 사람들과 한국어로 이야기할 때는 어두웠던 내가, 그들과 일본어로 대화할 때는 진짜 내가 되어 날아다녔다.

직속 상사였던 대리는 내가 회의에만 들어가면 빛이

난다고 했다.


어느 날, 대표가 오늘은 야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업무 이외의 이야기까지 통역을 해달라는 이야기였다.

평소에 야근이 거의 없었던 데다, 일본인 직원들 모두 한 상이 함께 해주면 더 즐거울 것 같다고 하기에 별생각 없이 양재역 근처의 일식집으로 향했다.


아는 사람들끼리의 저녁 식사,라고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자리의 규모는 점점 커져 온갖 업체의 대표들이 거들먹거리며 모여들었다.

나는 물 한 잔 마실 시간도 없이 그들의 거들먹과 농담을 모조리 통역해야 했다. 나이 50은 되어 보이는 어떤 에이전시 대표는 나를 언니라고 불렀다. (기왕 존칭을 할 거라면 누나라 하든지)

어린 나를 통역사로 데리고 다니는 대표는 잔뜩 신이 나 보였다.


그 ‘업무 이외의 이야기’는 자리를 옮겨 룸살롱으로 이어졌고, 통역이고 나발이고 한쪽에서 흙빛이 되어가는 내 얼굴을 본 그곳의 마담은 대표에게 '저 학생은 집에 보내야겠는데요'라고 말해주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나름 강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나는 불합리한 상황에서 내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대여섯 명의 중년 남성들이 만취해서 노는 꼴을 보고 있자니 아연해서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지하에서 나와 차가운 공기를 마시자 숨통이 트였다.

택시를 잡으려는데 잔뜩 취한 대표가 쫓아 나왔다.

이런 곳까지 오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고, 정말 미안한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야근수당이라며 지갑에서 수표를 꺼내서 내 가방에 쑥 넣는 것이었다.


30만 원.

택시 안에서 열어 본 가방에는 수표가 세 장 들어있었다.

그때 내 월급이 160만 원이었다.


내가 탄 택시가 한남대교를 건넜고, 강북에 닿았다.

마치 무너지기 직전의 다리를 무사히 건넌 듯, 안심이 밀려왔다.

눈을 비비며 문을 열어주는 엄마에게 받은 돈을 쥐어드린 후 화장실로 달려갔다.

빈속이었지만 구역질이 나서 견딜 수 없었다.


이 회사를 그만두어야지.

그리고 나는 다시는 강남에 취직하지 않을 거야.




얼마 후, 합작은 무산되었다. 다행히도 자연스레 그곳에 있을 명분을 잃었다.

다른 팀으로 옮겨준다고 하는 대표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지만, 지극한 애정이 지극한 증오가 되리라는 것을 몰랐다.

나를 아꼈던 대표는 사표를 내러 갈 때마다 화를 내거나, (지금도 믿을 수 없지만) 나를 피해 도망을 다녔다.

이런 서툰 이별은 어떤 남자 친구와도 한 적이 없다.


한 달쯤 지나,

대표의 내 앞날에 대한 일장연설과 약간의 저주 섞인 독설까지 들은 후에 퇴사를 할 수 있었다.


첫 직장, 이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세 가지가 떠오른다.

30만 원, 교대역, 그리고 초콜릿.


이중 가장 긍정적이었던, 초콜릿에 대한 기억은 제대로 일본어 통역을 해 보자는 마음을 불러일으켰고, 8개월 간 모아둔 돈을 털어서 통번역대학원 입시 학원에 등록했다.


결과는 보기 좋게 참패.

고작 서너 달 공부해서는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11월의 어느 날. ARS로 불합격을 확인하고는 조금 울었던 것 같다.


그렇게 1년을 버린 것만 같았다.

1년 전으로 되돌아 간다면, 그때 교수님의 제안을 거절했더라면. 나는 지금 어디 있을까, 그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서너 달 동안 입시학원에서 배운 일본어는 대학 4년 동안 배운 것보다 훨씬 더 밀도 있었고, 그 덕에 아르바이트로 지원한 출판사의 필기시험을 가뿐하게 통과할 수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내년에 있을 대학원 입시에 한번 더 도전해 볼 참이었다.


‘그래, 그래도 몇 달 공부한 걸로 아르바이트 자리라도 건졌네.’

뭐 하나라도 쓸모가 있었으니 다행이라고 여겼다.


2006년 12월의 일이다.


나는 그곳에서 차장 승진을 앞두고 퇴사했다.


2020년 3월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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