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드립 (by Tie)
그즈음해서 아는 형님이 알바자리 하나를 소개시켜줬어요. 지인이 카페를 열었는데, 하루종일 가게를 볼 수가 없어서 알바를 구한다고 하더라구요. 덤으로 그 지인이 일단 가게는 차렸다마는 커피에 대해서 잘 몰라서 저보고 사장 좀 가르쳐줘라고 하더라구요. 아시다시피 제가 커피덕후잖아요. 지금이야 그냥 커피 볶고 마시고 밖에 안하지만, 그땐 커피동아리 활동도 활발하게 했고, 다양한 커피집 사장님들이랑 바리스타들한테 이것저것 많이 배웠었거든요. 어쨌든 하루종일 공부만 하는것도 체질에 안맞고, 생활비도 좀 벌었어야 됐고, 카페일이니까 고민도 안하고 OK했죠.
카페알바는 나쁘지 않았어요. 오히려 사장이 다른사업땜에 가게를 계속 비워서, 실질적인 운영은 제가 했죠. 손님도 많지 않아서 공부도 하면서 여유롭게 가게 운영할 수 있었어요. 거래처 커피를 쓰긴 했지만, 아는 사람들이 오면 제가 볶은 커피를 내놓으며 품평회 같은 것도 했죠. 그렇게 커피가게 알바가 익숙해 진 어느 날, 걔한테 문자가 오더라구요. 가게 찾아 갈테니 주소 좀 알려달라고. 전에 잠깐 만났을 때 카페 알바 하게 됐단 얘기는 했거든요. 그땐 그냥 “잘됐네요, 나도 알바 구해야 되는데” 대충 그런 말만 했었어요. 그래서 갑자기 찾아올 거란 생각은 안했었죠.
나름 헤맸나봐요. 걔가 길치기도 하지만, 가게가 골목 안에 있어서 찾기가 쉽지는 않았거든요. 넘겨준 찬물을 바로 들이키고, 에스프레소를 한잔 달라고 하더라구요. 솔직히 깜짝 놀랐어요. 전에 저랑 커피가게 갔을따 생각해요? 제가 에스프레소 시키니 깜짝 놀랐잖아요. 그 쓴걸 어떻게 마시냐고. 물론 나야 에스프레소 참 좋아하고 잘 마신다마는… 근데 커피동호회 사람 말고는 저도 에스프레소 마시는 건 처음봐서 놀랐죠. 얘도 커피덕후인건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다행히 커피덕후는 아니고, 그래도 커피를 참 좋아한다고 하더라구요. 특히 취미생활 땜에 밤샐 일도 많고, 그래서 좀 독한 커피 찾다보니, 어느 새 블랙커피를 찾게 되고, 에스프레소까지 마시게 됐대요. 처음엔 정신이 번쩍 드는 쓴맛땜에 에스프레소를 마셨는데, 나중에는 에스프레소의 묘한 맛에 중독됐대요. 이해가 안된다고요? 한 10번 정도만 에스프레소 시켜보세요. 어느새 중독 될 수도 있어요.
그렇게 에스프레소를 시작으로, 커피에 대한 얘기를 이것저것 했어요. 처음에는 왜 카페 알바 하게 됐는지를 시작으로, 내가 커피 좋아해서 전국 카페 투어 다녔던 것, 동호회 활동하는 것 등등… 그냥 내 이야기를 한 건데 걔는 신기하다는 듯이 눈을 반짝이며 듣더라구요. 뭐랄까? 유럽으로 돌아온 콜롬버스가 신대륙 얘기하는 걸 듣는 이자벨 여왕 같다랄까? 그렇잖아요. 누가 내가 하는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 주면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이얘기, 저얘기, 쓸데없는 얘기까지 나오잖아요. 그렇게 내 이야기는 선을 넘어 커피의 기원, 추출방법, 커피용어, 로스팅방법 등 TMI수준으로 계속 얘기했죠. 그런데도 걔는 지겨워 하긴 커녕 끝까지 신기해 하며 제 이야기를 들어주더라구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걔가 원래 자기가 모르는 분야, 특히 전문적인 이야기를 듣는걸 참 좋아하더라구요.
많이 기뻤어요. 내가 커피한다고 하면 재밌는 취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거기서 끝이거든요. 동아리 사람들이나 커피로 많은 얘길 하지만, 세대차이가 나다 보니 한계가 있긴 하더라구요? 갑자기 웬 세대차이냐구요? 아, 그 얘기를 안했구나. 커피동호회 사람들이 대부분 현직 카페 사장님이나 관련분야 종사자다 보니, 대부분 40대 정도였거든요. 희한하게 젊은 사람이 없더라구요. 여튼 그런데 아는 애가 커피를 좋아한다, 그리고 내 커피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준다. 누군가가 내가 좋아하는걸 인정해준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걸 함께하는 사람이 생겼다. 그런 기분이 들었어요.
에스프레소를 마신 이후에는 제가 볶은 커피를 핸드드립… 그러니까 깔때기 같은거에 주전자로 직접 물 부어 터피 뽑는 거요. 대충 뭔지는 아시겠죠? 그렇게 핸드드립 커피를 뽑아 걔한테 건네줬어요, 솔직히 에스프레소보단 핸드드립이 더 전문이었거든요. 에스프레소는 동호회 아니면 가게에서나 머신 써서 뽑지만, 핸드드립은 집에서 맨날 뽑으니까요. 그때 내린 커피도 특히 그 근래 들어 가장 잘 볶은 커피였어요. 그때 걔가 제 커피를 마신 소감은 여전히 기억나네요. 어떻게 커피에서 이런 맛이 나냐고…
아마 카페알바 할때 걔랑 가장 친해진 시기라고 생각해요. 종종 알바할 때 놀러오면 제가 반갑게 맞아주고, 커피를 마시며 이얘기 저얘기 하면서… 일상이라 할 것 까진 아니었지만, 카페알바 하면서 얻은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생각해요.